지킬 수 있는 법 좀 만들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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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호 30면

생전의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인기가 높았지만 안티도 많았다. ‘DJ가 평생 거부하지 않은 세 가지는? 숟가락, 마이크, 그리고 돈봉투’란 문답이 있다. DJ 반대쪽에서 즐겨 입에 올린 단골 네거티브다.그런데 이 말은 사실과 차이가 있다. 정치인 DJ는 평소에 돈봉투를 철저하게 가렸다. 당 총재 시절엔 초선 의원들에게 ‘돈봉투 오리엔테이션’도 자주 열었다. 그럴 땐 정치인은 돈 문제에 철저해야 한다. 협회나 재단 돈, 급하게 들어오는 많은 돈을 받으면 아주 위험하다. 대가가 따른다고 거듭 충고했다.

최상연 칼럼

그런데도 이런 네거티브가 먹혔던 이유는 돈에서 시작해 돈으로 끝나는 한국 정치의 후진적 구조 탓이다.
대한민국 정치란 누가 뭐래도 아직 돈이 많이 든다. 밥값, 술값은 그렇다 치자. 돈 먹는 하마인 지구당(당원협의회)을 관리해야 하고, 명절엔 지인들에게 인사치레도 해야 한다. 요즘 검찰의 4·11 총선 관련 수사를 보면 공천 헌금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선거비용도 장난이 아닐 텐데 말이다. 당 지도부가 되기 위해 경선에 나설 땐 그야말로 뭉칫돈이 필요하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빠진 게 그런 함정이다.

19대 국회의원 중 30억원 이상의 재산가는 24명이다. 정말 그 정도라면 돈 걱정에서 자유로운 의원이 그렇게 많진 않을 것 같다. 전국을 상대로 하는 대선이야 더 말할 게 없다.그래서 우리 선거법은 돈 쓰는 걸 엄격하게 묶었다. 돈 선거, 돈 걱정을 없애자는 좋은 취지다. 좋은 법을 마련했으니 걱정이 사라졌을까? 아닌 것 같다.
19대 국회의원 수는 300명이다. 총선 직후 선거법 위반으로 검찰에 입건된 의원 수만 97명이었는데 시간이 흐르자 더 늘고 있다. 입건된 선거 사범은 1000명을 훨씬 웃돈다. 대선이 끝나면 ‘미니 총선’을 한 차례 더 치를 판이다. 이쯤 되면 국회의원 임명권자는 유권자가 아니다. 검찰이나 법원이다. 미국 등 선진국에선 지난 100년간 평균 2명 정도의 의원직 상실자가 나왔다. 그런데 우린 18대에만 15명이었다. 보선 비용만 1000억원을 넘는다.

우리 선거법은 좋은 취지와 달리 사전 규제와 사후 처벌을 되풀이하며 악명만 차곡차곡 쌓고 있다. 이런 선거법이라면 손을 대야 한다. 과거의 ‘고무신 선거’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다. 지키지도 못할 법을 들이대 선출직 공직자들이 교도소 담장 위를 걷게 하진 말자는 거다. 미국식도 있고 유럽식도 있다. 총선이라면 선거구를 확 키우는 방법도 있다.

가뜩이나 대한민국엔 지키기 어려운 법들이 차고 넘친다. 당장 세법이 그렇다. 인천국제공항을 드나들며 면세 범위를 떠올릴 때면 누구나 느낀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고위 공직자 인사청문회를 보자. 위장 전입은 낙마의 단골 메뉴다. 고위 공직자라면 법의 집행자이니 선거법이든 주민등록법이든 위반하면 안 된다. 하지만 주민등록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국민은 과연 얼마나 될까.

12월 대선을 앞둔 정치권이 정치쇄신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업그레이드 정치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 그런데 정치쇄신 입법에 앞서 꼭 쇄신돼야 할 선결 조건이 있다. 법을 지키는 문제다. 그것도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먼저 지켜야 한다. 선거법은 훌륭한 출발점이다. 좋은 선거는 선거법 위반자를 양산하는 게 아니다. 좋은 후보를 당선시켜 정치 발전을 이끄는 거다. 지킬 수 있도록 바꾸고 바꾼 뒤엔 엄격해야 한다.

법을 지켜 당선되면 국회법도 준수해야 한다. 지키지 못할 대목이 있다면 국회법도 바꾸고, 따라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법을 무서워한다. 그런 나라가 선진국인데, 우린 아직 아니다. 법을 어겨도 감방에 안 가는 기술을 아는 게 대한민국 정치인의 조건이라고 사람들은 얘기한다. 우리 정치인들이 언제까지 이런 조롱을 받아야 하나. 이젠 고리를 끊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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