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 읽는 이유, 21세기 글로벌 르네상스의 밑거름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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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 샤를 드 부엘은 인간 존재의 4 단계를 이렇게 정리했다. 돌처럼 존재하는 인간(나태한 사람), 식물처럼 살아가는 인간(식충이), 말처럼 느끼는 인간(헛된 사람), 사람답게 이해하는 인간(학자). 그가 생각할 때 사람이 정말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인문학(humanism)에 대한 소양이 필수고, 고전을 읽는 것이 최선이었다.

 당시 인문주의자들은 이웃 비잔틴 제국에서 그 동안 유실되었던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 텍스트를 많이 발굴했다. 그런데 비잔틴 제국은 단지 고전을 잘 보존했다가 원래 그대로 되돌려주는 냉동 창고 역할만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서유럽에 전해준 것은 비잔틴·아랍·인도의 철학과 과학이 더해져 훨씬 풍요로워진 체계였다. 고전은 영구불변의 상태로 지속되는 게 아니라, 문명간에 교류되고 그 과정에서 더욱 깊고도 창의적인 사유를 계발시킨다.

 유럽과 중국간의 교류도 그런 맥락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17~18세기에 중국에 들어갔던 예수회 신부들이 중국의 고전을 유럽에 소개해 지성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라이프니츠가 『주역』을 공부하다가 음양의 원리에서 영감을 얻어 2진법을 개발한 것처럼 기상천외의 방식으로 영향을 받기도 했다. 라이프니츠는 “중국이 오히려 우리에게 선교사를 보내 자연철학의 목적과 실제를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유학에 근거한 중국 황제의 통치는 유럽 철학자들 간에 진지한 논의를 불러왔다. 프랑수아 케네는 도덕을 통해 권력 남용을 막는 중국 통치체제에 감탄했고, 볼테르는 중국 황제야 말로 플라톤이 말한 철학자-왕의 모범이라고 판단했다. 반면 뒤 알드는 “중국을 통치하는 것은 몽둥이”라고 단언했고, 몽테스키외 역시 “중국은 전제국가이며 통치의 원칙은 공포”라고 비판했다. 이런 식으로 유럽은 중국을 비롯한 모든 문명의 중요한 고전을 연구하면서 스스로의 깊이를 더해 갔다.

 많은 중국 고전들이 유럽에 전해진 시기에 중국은 유럽의 고전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이를 두고 찬란한 중국 문명이 오랑캐들을 감화시켰다고 해야 옳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중국은 기술과 자본과 군사력 면에서 유럽에 지기 전에 정신적으로 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새로운 생각을 해보자. 고전 공부는 누가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해 주는 것이다. 21세기에 아시아의 시대가 도래한다고 할 때, 그것은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경제력이라든지 패권주의적 군사력이 아니라, 세계인의 사상적 깊이를 더해 주는 동양 고전의 지혜가 더 앞서야 한다. 고전은 늘 국제적으로 교류됐고, 늘 새롭게 해석돼 영감을 주었다. 글로벌 르네상스가 ‘여기 이곳에서’ 발아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주경철 교수(서울대·서양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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