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이슈] 이종격투기 허와 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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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랗게 물들인 머리카락, 휘청이는 테크노 댄스. 지난 19일 이종격투기 링에 처음 선 최홍만은 흥분해 있었다. 현란한 조명과 늘씬한 라운드걸에 둘러싸여 우승의 기쁨을 만끽한 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씨름판을 떠난 걸 후회하지 않는다. 새롭게 태어난 것 같다."

그 대회(K-1 서울그랑프리)가 끝난 지 일주일. 아직도 인터넷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스포츠스타 검색 순위 상위권은 이종격투기 선수들이 몽땅 차지한다. 최고 110만원(링사이드)까지 한 티켓도 팔렸다. 록그룹 공연처럼 격한 이 퓨전 스포츠에 쏠리는 열광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다.

"폭력성 논란 때문에 아직 중계는 이르다. 하지만 팬으로 따져 보면 지상파 방송 프라임 타임에 드라마와 경쟁할 수 있는 스포츠는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와 이종격투기밖에 없을 것이다."(정연규 한국방송광고공사 DMB영업팀장)

격렬하면서도 프로레슬링과는 달리 '각본 없는 진짜 싸움'이라는 매력은 꽤 오래갈 것 같다. 하지만 그 열광의 대가도 간단치가 않다.

우선 돈이다. K-1을 주최하는 일본의 FEG(Fighting & Entertainment Group)는 이번 서울대회를 통해 10억원 정도(추정)를 벌어갔다. 그들의 철저한 흥행성에 우리가 지갑을 열어준 셈이다. "서울대회 대진은 최홍만을 우승시키기 위한 대진이라는 냄새가 난다. 그러다 보니 경기 수준이 낮았고, 많은 팬을 실망시켰다."(격투기 평론가 조용직)

우리 선수들이 흔들리는 것도 대가라면 대가다. 이종격투기의 본고장이 된 일본으로 하나 둘 떠나간다. 1991년 레슬링 아시아선수권 우승자인 최무배는 프라이드 선수로, 민속씨름 천하장사 출신 최홍만은 K-1으로,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유도 은메달리스트 김민수는 K-1이 새로 만든 종합 격투기 '히어로스'로 갔다. 김민수는 26일 일본에서 '링의 야수'로 불리는 밥 샙(미국)과 싸운다. 그는 "돈 때문이라기보다 화려한 무대에서 뛰어보고 싶었다"고 했다. '막싸움' 소리를 들으면서도 이종격투기는 이미 기존의 스포츠 지형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이종격투기 열풍 뒤의 그늘을 주시하라는 목소리도 커져 간다. 학교폭력이 이종격투기 붐과 함께 심화됐다는 어느 중학교 교사의 지적도 새겨들을 만하다.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는 일에 불감해지고 있다는 현장의 소리다. 윤세창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교수는 "무의식 속의 공격 본능이 그대로, 지속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그 폭력성에 대한 부작용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한다.

성호준.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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