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8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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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고정애
정치국제부문 차장

84%.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전당대회 득표율이다. 전당대회장 배경이 붉은색이어선지 정치권과 거리 있는 인사 몇몇이 공히 중국 공산당 당대회를 떠올렸다. 일견 그렇게 보일 순 있겠다. 그간 정치권의 최고치는 77.5%였다. ‘가신(家臣) 정치’의 대명사 격인 DJ가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뽑히던 1997년의 기록이다. 민주통합당에선 “다섯 명이 뛰던 경선에서 84%의 득표율을 거둔 건 사당(私黨)의 증거라고 볼 수밖에 없다”(박지원)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체 선거인단 중 얻은 표의 비율을 보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투표율까지 감안하자는 얘기다. 97년의 DJ는 73.8%(투표율 95.2%X득표율 77.5%)의 지지를 받았다. 이번에 박근혜 후보는 35.5%였다. 사당화 정도에선 DJ엔 한참 못 미친 거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기준으로 치른 2007년 한나라당 전대는 어떠했을까. 박 후보가 선거인단 투표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근소하게 앞선 선거 말이다. 그때 박 후보의 득표율이 얼마였을 것 같은가.

 공교롭게도 34.9%다. 올해와 차이가 0.6%포인트에 불과하다. 수학적으로 보면 새누리당(또는 한나라당) 선거인단 중 투표장을 찾아 박 후보에게 한 표를 던진 사람의 비율이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대동소이한 거다. 이명박 대통령이란 강력한 경쟁자가 빠졌는데도 그랬다.

 박 후보의 당선이 확실한 상황에서 ‘나 하나쯤 빠져도 되겠지’라고 생각한 이들이 많았을 거다. 하지만 박 후보가 마뜩찮아 기권한 사람도 있을 거다. 박 후보 강세 지역의 투표율은 고공행진한 반면 열세 지역인 서울(40.5%)·인천(35.8%)·경기(35.1%) 등 수도권은 평균(41.2%)을 밑돈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전문가들은 실제 “비박근혜 성향의 사람들이 투표장에 안 나옴으로써 의사를 표시했다”고 분석한다.

 박 후보가 노력을 안 한 건 아니다. 보수의 아이콘이던 그는 2009년 스탠퍼드대 연설에서 ‘원칙이 바로 선 자본주의’를 강조하며 왼쪽으로 선회했다. 그 이후 복지, 경제민주화를 외치며 진보의 가치를 선점해 왔다. 지난해 비대위원장이 된 뒤엔 한나라당을 새누리당으로 바꿨다. 그사이 당협위원장도, 당 지도부도 박근혜계 일색이 됐다. 경선 과정에선 이재오·정몽준을 배제했다. 정책과 조직 모두를 강화한 거다. 그런데도 전대 결과 바닥 당심은 ‘84%’란 수치만큼 열렬하지 않다는 게 드러났다.

 사실 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한국 대선의 경험칙 몇 개가 깨지게 된다. YS를 빼곤 몇 년간 내리 1등 한 후보가 대통령이 된 일이 없었다. 또 수도권에서 열세인데 집권한 전례도 없었다. YS는 서울에서 졌지만 수도권 전체론 이겼다. 수도권은 전통적으로 민주주의에도, 경제적 이익에도 예민했다. 박 후보는 과거엔 행정수도 이전 문제로, 최근엔 권위적 행보로 수도권 민심과 멀어진 상태다.

 박 후보는 또 “국민의 3분의 2 이상으로부터 박수를 받아본 적 없는 정치인”(김헌태, 『박근혜 현상』)이기도 하다. YS와 DJ는 민주화 운동의 두 축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의원 명패를 던지며 국민적 스타가 됐고 이 대통령은 샐러리맨의 신화였다. 박 후보는 주로 새누리당의 간판이었다. 그의 성공담은 여야 대결 속에서 나왔다. 곧 누군가의 패배였다는 의미다. 그로 인해 보수 진영에선 열렬하지만 조금만 비켜서면 미적지근하거나 냉담하다. “박 후보의 지지율은 고정물”이란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박 후보가 누구보다 대권에 가까이 선 사람이지만 여전히 먼 길을 가야 한다고들 얘기되는 까닭이다. 그간 박 후보에게 호의를 가져본 적이 없는 또는 가질 생각이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야 하기 때문이다. 근래 한두 차례의 행보를 ‘변화’로 반기는 이들은 애초 지지자일 가능성이 크다. 관망자 또는 반대자 일부라도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선 변화가, 그것도 근본적인 변화가 향후 넉 달간 축적돼야 한다. 주변 사람이 바뀌는 걸 포함해서 말이다. “죽기 살기로가 아닌 죽기로 했더니 되더라”는 말, 딱 박 후보를 위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