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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자수, 중국어 성경 찍고 밀가루 공장 세워 떼돈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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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호 33면

◀ 19세기 말, 미국성서공회는 독립선교를 표방한 쑹자수에게 중국어판 신약성서 판권을 줬다. 충칭(重慶)에 도착한 중국어 성경. 중국옷을 입은 서양 선교사들의 모습이 흥미롭다.   [사진 김명호]

쑹자수(宋嘉樹·송가수)는 뭐든지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창장(長江) 유역에서 기독교 배척 운동이 발생하자 실태 파악에 나섰다. 서양 선교사들이 위험하다고 말려도 개의치 않았다. “정확한 원인은 책상머리에서 나오지 않는 법, 현장에 가야 답이 나온다. 중국인은 중국인을 때리지 않는다(中國人不打中國人).” 실제로 위험지역을 다니는 동안 얻어맞거나 돌팔매질을 한 번도 당하지 않았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83>

상하이로 돌아온 쑹자수는 미국 감리교 중국교구에 보고서를 보냈다. “선교사들 중에는 서양깡패로 전락한 사람들이 많다. 중국 부녀자 5명을 한집에 데리고 사는 미국인 선교사를 내 눈으로 직접 봤다. 지방관과 결탁해 무고한 농민을 사형에 처한 선교사도 있었다. 이건 엄연한 중국의 사법권 침해다. 중국인들이 울분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서구 열강이 선교활동을 보호하기 위해 군함 20여 척과 사병 3000명을 파견했다. 쑹자수는 선교사들을 찾아다니며 호소했다. “무장한 외국 군인들이 거리를 순시하며 기독교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폭도로 다룰 태세다. 우리 측에 희생자가 나와도 저들을 처벌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매달리면서도 우매한 민중을 탓하지 않았다.”

▲ 쑹자수의 유일한 초상화. 동서양이 절묘하게 조합된 사람이었다.

외국 선교사들은 쑹자수에게 삿대질을 해댔다. “네 말대로 했다간 언제 맞아 죽을지 모른다. 우리 모두 중국을 떠나란 말이냐. 네가 맞아 죽어봐라 네 집사람이 우리보다 더 길길이 뛸 거다.” 거의 막말 수준이었다.
쑹자수는 굽히지 않았다. “교회 권력이 지나칠 정도로 비대하다. 그간 온갖 간섭을 다했다. 선교에만 충실하고, 중국의 내정을 간섭하지 않으면 반감이 일어날 이유가 없다. 우리가 먼저 화해를 청하자.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겠다는 전단을 배포하자”고 했지만 허사였다. “인쇄소 차려서 재미 본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 뭐든지 인쇄할 생각만 한다”는 핀잔만 들었다.

선교사들은 상하이 도대(道臺·지방장관)에게 교회와 신자들의 안전을 책임지라고 압박했다. 청나라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광서제(光緖帝) 명의로 기독교 반대운동에 참여하는 자들을 신속히 진압하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쑹자수는 무릎을 쳤다. “모든 원인은 선교사들의 횡포 때문이 아니다. 청(淸)나란지 뭔지를 쓸어버리지 않는 한 중국에 희망은 없다.” 둘째 딸 쑹칭링(宋慶齡·송경령)이 태어나자 “부디 위대한 반역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쑹자수는 미국 감리교회와 결별했다. 중국기독교자립회(中國耶蘇敎自立會)를 결성하고 독립선교를 선포했다. 자신의 집에서 첫 번째 회의를 열었다. 종파를 구별하지 않다 보니 참석자들이 많았다. 외국인 선교사들도 적지 않았다.

이날 쑹자수의 설교는 일품이었다고 한다. “미국은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많지만 위대한 나라다. 인류문명의 모범인 사상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전통을 수립했기 때문”이라며 미국인들을 치켜세웠다. 이어서 중국인 신자들에게 눈길을 줬다. “예수 탄생 1620년 후, 102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의 플리머스에 도착했다. 이들은 메이플라워 서약을 통해 자립정신의 토대를 마련했다. 지금 중국의 정치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고, 국민은 우매하다. 우리는 마음을 다해 국가를 사랑하고(盡心愛國), 민간의 지식을 계발(開通民智)시키기 위해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중화민족의 자립정신을 환기시키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독립은 자유와 고독을 수반했지만 쑹자수는 평소 쌓아온 교양과 사업의 번창, 중국을 뒤집어엎겠다는 일념으로 이런 것들을 극복했다.
혁명에는 돈이 필요했다. 쑹자수가 세운 화메이(華美)인쇄소는 성경을 염가에 보급하고 밀가루 공장도 세웠다. 돈이 쌓이자 혁명파들의 요구라면 무조건 들어줬다. 낮에는 쑤저우(蘇州) 방언으로 된 신약성서를 찍고 밤에는 혁명단체의 선언문과 전단을 찍었다. 혁명채권을 찍을 때도 있었다.

쑹자수는 하다 보면 중국의 조지 워싱턴이나 링컨이 될 사람을 만날 날이 온다고 굳게 믿었다. 후일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의 설계자로 중국 역사에 기록될 루하오둥(陸皓東·육호동)을 통해 쑨원(孫文·손문)이라는 청년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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