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정의와 배신 사이에서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83호 35면

“배신은 신뢰의 가면을 탈각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잘 자고 난 아침처럼 개운하다. 당장은 아니고 천천히, 그렇지만 믿음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보다 더 완벽하게.”

권석천의 세상탐사

시인 김소연은 마음사전에서 배신을 이렇게 풀어놓는다. 부모의 기대에, 연인의 사랑에 등을 돌려본 자는 알 것이다. 미안함과 후회가 짜릿함·후련함과 뒤범벅되는 그 아득한 느낌을. 하지만 우린 자신이 누구를 배신했을 때보다 배신당했을 때의 낭패감과 모욕감을 더 선명하게 기억한다. 여기에 의리를 중시하는 유교 문화가 덧붙여지기 때문일까. 한국 사회는 내부고발자의 가슴에 세 글자의 주홍글씨를 새겨놓곤 한다. 배·신·자.

“조직도 주인도 배신하는 인간성의 소유자.” “보상금 타먹으려는 거짓말.” “제2의 김대업 사건.”

요즘 인터넷과 트위터 공간에 떠다니는 말들이다. 이런 말들은 한 사람을 향하고 있다. 현영희 새누리당 의원(비례대표)의 돈 공천 의혹을 폭로한 정동근씨. 현 의원의 수행비서 겸 운전기사였던 정씨는 “4·11 총선을 앞두고 현 의원 지시로 비례대표 공천 대가인 3억원을 전달했다”고 중앙선관위에 제보했다. 중간 전달책으로 지목된 전 새누리당 부산시당 홍보위원장 조기문씨에 대해 검찰이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함으로써 정씨의 제보는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공천 개혁을 외쳤던 새누리당 박근혜 캠프엔 경고등이 켜졌다.

이런 상황 전개 속에 정씨에 대한 비난 수위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현 의원 측은 “4급 보좌관을 달라고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벌인 일”이라며 순수성이 결여된 제보임을 강조하고 있다. 새누리당에선 “정씨가 거액의 포상금을 노리고 계획적으로 제보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정씨가 정의감에 따라 ‘양심선언’을 한 것은 아닌 듯하다. 그는 조씨에게 돈이 든 쇼핑백을 전달했다는 3월 15일의 상황을 분 단위로 기록한 비망록을 선관위에 제출했다. 또 쇼핑백을 휴대전화로 찍어뒀다고 한다.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정씨의 제보를 돈 때문에, 앙심 때문에 주군을 팔아넘겼다는 ‘배은망덕’의 프레임 안에 가두는 것은 온당치 않다. 제보 내용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선거법 위반이나 뇌물, 횡령 같은 화이트칼라 범죄는 구체적인 피해자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민이나 기업이 피해를 보는 것이지만 강도·사기처럼 “내가 이런 피해를 봤다”고 나서는 이가 없다. 이 때문에 내부자의 도움 없이 범죄 혐의를 밝혀내기란 쉽지 않다. ‘특정범죄 신고자 등 보호법’과 공익 신고자 보호법이 신고자를 두텁게 보호하는 이유다. 강력범죄 등을 신고한 이나 그 친족이 보복당할 우려가 있을 때는 신고자의 성명·연령·주소·직업 등의 전부 또는 일부를 조서 등에 기재하지 않을 수 있다. 또 신고자 인적사항 등을 공개 또는 보도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직선거법은 선거범죄 신고나 제보로 피해를 볼 우려가 있을 때 같은 규정을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 정씨의 경우 어찌 된 영문인지 구체적인 인적사항은 물론 얼굴 사진까지 공개되고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제보자를 피의자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사회 분위기가 또 다른 범죄 제보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내부 문제를 외부에 알리면 국내에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숱한 범죄를 은폐시키는 결과를 빚게 된다.

정씨의 행동이 모두 옳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다만 그의 제보가 없었다면 비례대표 공천을 놓고 오갔던 검은돈은 계속 물밑에서 감춰져 있었을 것이다. 공천헌금, 아니 공천뇌물의 관행 역시 분별 없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바로 그 점에서 정씨 같은 제보자도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잘못은 부정한 심부름을 시킨 사람에게 있다. 애초에 배신당할 일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는 영국 속담이 있다. 정의로운 나라로 가는 길은 반드시 선의로 포장돼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강도 만난 나그네를 돕는 ‘착한 사마리아인’만 정의를 세우는 건 아니다. 때로는 배신자가 정의를 세우기도 한다. 그들을 존경할 순 없다 해도 비난하거나 미워할 일은 아니다.

우리가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정의보다 의리가 앞서기 때문인지 모른다. 배신을 두려워하는 사회는 깨끗해질 수 없다는 진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