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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심, 섹시한 40대 댄스강사와 황혼 로맨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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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당신. 만일 6주라는 시간이 남겨진다면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어차피 다 끝난 인생,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게 편할까요?
72세의 노부인 릴리. 평생 누군가의 아내로, 엄마로만 살아온 그녀는 늦었지만 자아를 찾아 일어섭니다.
‘여섯 주 여섯 번의’ 댄스 레슨을 통해서죠. 인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워보려고 행동에 나선 노부인을
배우 고두심(61)씨가 응원합니다. 연기 인생 40주년을 맞은 그녀 역시 새로운 도전에 흠뻑 취해 있습니다.
5년 만에 선 연극무대에서 한바탕 춤판을 벌렸네요. Shall We Dance?

우아한 70대 노부인과 섹시한 40대 댄스강사의 만남. 황혼의 로맨스가 연상되지만 연극 ‘여섯 주 동안 여섯 번의 댄스 레슨’은 늙어가는 것에 대한 연극이다. “늙으면 사라지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을 땐 존재한다는 느낌이지만 남편마저 없으면 투명인간이 된다” “인생을 사는 게 아니라 그냥 옆으로 휙휙 지나가는 걸 보고 있는 느낌. 기차 타고 바깥 풍경을 보는 것처럼 만지지도 않고 상관하지도 않고 그냥 보기만 하는 것” “노을은 마지막 순간이 가장 아름답다. 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 태양은 가장 밝은 빛을 토해낸다” 등 명대사 퍼레이드에 숙연해지다가도 명배우 고두심과 10년 무명을 딛고 최근 주목받기 시작한 실력파 연극배우 지현준의 찰떡궁합에 어느새 유쾌해지는 맛깔스러운 무대다.

비엔나 왈츠

-‘친정엄마’이후 5년 만의 연극 무대입니다.
“연극무대는 공포감이 말도 못하죠. 하지만 그만큼 짜릿함을 맛보고, 관객과 함께 어우러져 호흡하는 그 자체를 즐기고 있어요. 그 희열은 다른 어디서도 느낄 수 없거든요.”

-연기인생 40년에 공포감이 남아 있나요.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연극은 편집이 없으니 무서울 수밖에요. 이 작품은 적당히 애드립도 안 되는 작품이에요. 우리 창작극이면 어떻게 구겨서라도 넣어보겠죠. ‘친정엄마’ 같은 작품이면 그 인생 자체를 봐 왔고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이건 어떻게 구겨 넣어볼 수도 없어요. 이런 삶을 살아봤어야 말이죠.”

-방송에서 “엄마 역할 이제 그만. 사랑하다 죽고 싶다!”길래 로맨스인 줄 알았더니 우정에 관한 작품입니다.
“그거야 관객몰이하려고 그런 거지, 이 나이에 무슨 … 하긴 황혼의 로맨스도 있으니 조금 더 기다려 보죠 뭐. 하하.”

-늙어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에 몰입이 잘 되던가요.
“내 나이도 육십 고개에 들어서니 공감되는 지점이 참 많네요.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지는 않잖아요. 남은 인생에 어떤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걸 이 작품을 통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어떤 그림인가요.
“지금까지 인생을 주어진 대로 살아 왔다면 앞으로는 거기에 플러스 알파로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두리번거려 보고, 찾았다면 부지런히 해야 된다는 거죠. 나이 탓만 하고 앉아 있을 필요는 없다는 걸 이 작품을 통해 모두에게 얘기해주고 싶어요.”

-릴리가 암치료를 받으면서 댄스 레슨을 시작한 것처럼요.
“릴리는 목사 사모라는 틀에 갇혀 살다 혼자 남겨졌죠. 그렇다고 흐지부지 인생을 마감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나도 꿈이 있었는데, 이제부터라도 다르게 살아야겠다고 용기를 낸 거예요. 그 나이에 사실 춤이 가당치 않지만 해보니까 되잖아요. 덕분에 남은 삶이 의미 있어졌고.”

-춤 실력이 대단하신데 꾸준히 춤을 춰왔나요.
“학교 때 고전무용은 배웠지만 서양 춤은 처음 춰봐요. 누가 블루스 추자고 하면 그냥 끌려서 왔다갔다 하는 건 줄 알았지. 춤추는 건 쉽지 않았어요. 6개월을 배웠는데, 오늘 배운 걸 내일 못하는 거예요. 생각이 안 나더라고. 여섯 가지 춤의 스텝이 다 다르니까. 처음엔 스윙이 뭔지, 폭스트롯이 뭔지 발을 놀려봤어야 말이죠. 음악도 차차차 음악인지, 탱고 음악인지 구분도 못하고 헤맸어요.”

-재미도 있으시죠. 춤을 통해 자아를 찾는 영화도 많잖아요.
“너무 재밌어요. 춤을 통해 정말 치유가 되겠더라고. 춤이란 게 스킨십이잖아요. 누군가와 스킨십을 하고 있다면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와 스킨십을 하고 있다는 것이 기분 좋잖아요. 손을 잡고 있다는 건 분명히 내가 살아 있다는 거니까. 그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커요. 그러니 중년 이후에 혼자라며 우울해 할 필요 없어요. 춤도 배우고 누군가와 대화도 하고, 그러다 친구도 생기는 거죠.”

-목사 사모인 릴리가 “죽기 전에 십계명 몇 개라도 어겨 봐서 속이 다 시원하다”는 대사가 인상적이었어요.
“그렇다고 기독교 비판적인 내용은 아니에요. ‘성경 구절 그대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성경 속에 숨어 있는 인간성을 놓쳐버린 거다’는 대사가 있죠. 성경에는 수많은 진리가 있는데 그걸 놓쳐버리고 자기 생각만을 성경에 끼워맞추면 그렇게 된다는 거지 결코 종교 자체에 대한 비판은 아니에요. 숨어 있는 진리를 못 보고 자기 주장만 하면 안 된다는 얘기죠.”
고두심은 제주도에서 태어나 학창시절 고전무용을 전공하면서 어렴풋이 배우의 꿈을 품었다. 고교 졸업 후 상경해 무역회사에 다니면서 1972년 MBC 공채 탤런트로 선발된 것이 연기인생의 시작. 80년 시작된 장수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큰며느리 영남엄마 역을 맡아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출연한 드라마만 단막극을 포함해 100편 이상. 영화 17편, 연극 9편에 출연했다. 방송 3사의 연기대상을 모두 수상한 유일한 연기자이자 총 5회 수상으로 최다수상 기록까지 갖고 있다.

-드라마로 연기를 시작했는데, 연극무대가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40주년 기념으로 연극무대를 선택한 건 나를 클리닉하고 싶었던 마음이 커요. 현장에서 관객과 함께한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고요. 많이 해보지 못한 무대인 만큼 더욱 욕심이 났어요.”

-전작 ‘친정엄마’는 최루성이었는데 이번 작품은 상당히 스타일리시하네요.
“우리 관객 취향이 50대가 넘으면 최루성 작품을 좋아해요. 한이 많으니까 아파하면서도 그렇게 우는 걸 좋아하죠. 이 작품은 오히려 젊은 관객이 호흡을 잘 맞춰줘요. 30~40대가 제일 호응이 좋은 것 같아요. 50~60대가 공감할 줄 알았더니 문화생활을 많이 한 젊은이들이 열렬히 반응하더라고요.”

-젊은층과 중장년층을 아우르는 보기 드문 작품인 것 같습니다. 고두심 출연으로 중장년층을 공연장으로 이끄는 계기도 되고요.
“나이 든 분들이 공연문화에 익숙하지 못해 해석을 어려워하는 건 안타까워요. 나부터 요즘 어휘가 낯설어 외우는 데 애먹었거든요. 게이에 대해서도 50대 이상은 배척하는 경향이 강하니까.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그런 문화에 아주 익숙해져 생각만 좀 다른 같은 인간으로 받아들이니 호응이 빠르고, 그런 차이가 좀 보여요.”

-40년 동안 100편이 넘는 작품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아무래도 전원일기를 22년 동안 했으니까. 정말 좋은 작품이었어요.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해 주는 드라마였거든요. 남녀노소가 함께 앉아 볼 수 있고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걸 깨닫게 하는, 정이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그 작품을 오래 했던 게 가장 좋았어요"

-다양한 역할을 맡으면서도 모범적인 여인상을 잘 관리해 온 비결이라면.
“여인은 무슨. 그냥 엄마였고, 이제 할머니로 가겠죠. 관리한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주어지는 일에 책임감이 강해 시청자들과의 무언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한 부분은 내 삶의 개똥철학이긴 해요. 사람들에게 꿈을 줘야 할 입장에서 내 행동과 내 모든 것이 어떻게 반영되리라는 걸 늘 생각하며 사는 거죠.”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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