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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영화 친구' 이무영과 박찬욱

중앙일보

입력

"나의 과격한 왼손" 이라고 박찬욱(38) 감독이 이무영(37) 감독을 치켜세우자 이감독은 곧바로 "내 오른손의 양심" 이라고 받아친다. 탁구를 치듯 주고 받는 말이 여간 정겨운 게 아니다. 다음달 12일 개봉하는 영화 '휴머니스트' 시사회장에서 만난 그들은 요즘 한창 유행하는 단어인 친구 자체였다. 눈짓만 해도 상대의 속내를 읽는 듯 대화에 막힘이 없다. 충무로에서 단짝으로 소문난 그들이다.

지금까지 함께 한 영화는 10여편. 박감독의 작품 '삼인조' (1997년) '공동경비구역 JSA' (2000년) 를 포함해 '간첩 리철진' (장진 감독.99년) '아나키스트' (유영식 감독.2000년) 등의 시나리오를 같이 썼다.

신작 '휴머니스트' 에서도 손발을 맞췄다. 달라졌다면 지금까지 작가로 활동했던 이씨가 감독으로 돌아섰다는 점. '휴머니스트' 는 투자자를 찾지 못해 처음엔 이감독이, 그 다음엔 박감독이, 그리고 다시 이감독이 연출을 맡은 기구한 운명의 영화다.

그런데 '과격한 왼손' '오른손의 양심' 이란 말은 무슨 뜻□ 수족처럼 가깝다는 말인가.

박감독이 설명한다. "서로 성격이 판이해요. 제가 침착하고 차분한 반면 이감독은 괄괄하고 흥분을 잘 하죠. 다소 우유부단한 저를 추진력 있게 끌고가는 측면이 있어요. "

이감독이 화답한다. "사실 박감독이 없었다면 영화를 할 생각조자 못했을 겁니다. 영화라는 한 우물을 파는 열정이 대단하죠. 그가 탐닉하는 영화란 게 대체 뭔지 알아보려다 어느새 길동무가 됐어요. "

두 사람이 걸어온 길도 다르다. 영화감독 가운데서도 지독한 영화광으로 유명한 박감독이 영화평론.시나리오 작업 등 스크린 외길을 걸은 반면 이감독은 팝칼럼니스트.라디오 DJ.TV 연예프로 패널 등 일인다역으로 뛰어왔다. '휴머니스트' 에서도 이감독은 음악감독을 겸했고, 또 직접 연기하는 등 다양한 재주를 발휘했다.

그들이 처음 만난 때는 지난 91년.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 을 촬영하던 박감독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 송승환의 소개로 미국에서 경영학.드라마를 공부한 이감독을 알게 됐다. 이후 이감독이 진행하던 라디오 음악프로에 박감독이 자주 나오고, 새벽을 잊고 마셔댄 술로 관계가 돈독해졌다.

박감독은 그들 사이를 신구(新舊) 의 만남으로 요약했다. 자신이 가톨릭 집안인 반면 이감독은 목사의 아들이라는 것. 또 자신이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 반면 이감독은 록음악을 좋아하고, 굳이 접점을 찾는다면 재즈라고 말했다.

"어느날 갑자기 자기가 쓴 시나리오를 들고 왔어요. 처음엔 정말 아마추어 습작 같았어요. 그런데 엉뚱한 구석이 많더라구요. 생각이 자유로웠죠. 또 막상 작업을 같이 해보니 죽이 잘 맞아요. " (박감독)

"함께 시나리오를 써도 역할분담 같은 것은 없습니다. 한 사람이 생각을 말하면 다른 사람이 자판을 두둘기고, 또 그것에 싫증나면 서로 역할을 바꾸는 식으로 일을 하죠. 그런 까닭인지 혼자 쓸 때보다 작업 속도가 상당히 빨라요. " (이감독)

그들은 2년 전 아예 서로의 성을 따서 공동창작집단인 '박리다매' 를 만들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의 유승완 감독과 유감독의 아내인 영화기획자 강혜정씨가 세운 독립프로덕션인 '외유내강' 을 본땄다고 한다. '휴머니스트' 는 박리다매의 이름을 달고 나온 1번 타자다.

그들을 묶는 가장 강력한 힘은 영화에 임하는 자세. 영화란 못 가지고, 덜 배우고, 상처받은 사람의 얘기를 다뤄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낸다. 박감독은 'JSA' 로 대박을 터뜨렸지만 화려한 작품보다 소박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엔 전혀 변함이 없다고 말한다. 현재 준비 중인 신작 '복수는 나의 것' 에서도 우리 사회의 그늘을 들춰낼 작정이다.

"앞으로도 세상의 빛이 닿지 않는 곳에 감춰진 얘기를 다루려고 합니다. 밝은 영화는 다른 사람들이 많이 하잖아요. 삶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우리 사회가 좀더 건강하게 되는 데 일조한다면 대만족이죠. " (이감독)

그들은 96년 화재사고로 사망한 이훈 감독을 가장 아쉽게 여겼다. 엉뚱함.단순함.자유로움을 추구했던 그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 그래서 '삼인조' 는 없어졌지만 '이인조' 의 행진은 멈출 수 없다고 강조했다. '휴머니스트' 가 끝난 후에 올라가는 자막의 '고마운 분들' 가운데도 이훈이란 이름이 가장 먼저 뜬다.

박정호 기자

*** '휴머니스트'는…

'휴머니스트' 는 인본주의자를 뜻하는 제목과 달리 '안티' 휴머니스트적인 작품이다. 겉으로 드러난 얘기만 따지면 패륜적인 영화로 볼 수 있다. 돈이 궁한 백수건달형의 부잣집 아들이 퇴역장성인 아버지를 납치한다는 내용 자체가 그렇다.

게다가 엽기적인 화면도 자주 등장한다. 거지의 썩은 다리를 도끼로 내려친다든지, 온몸에 부상을 당한 멍청한 친구가 민간요법에 따라 똥물을 들이킨다든지, 납치극을 목격한 순박한 수녀를 겁탈하려는 등등.

그러나 잔혹한 화면의 충격요법에 기대는 일반 엽기물과 달리 '휴머니스트' 는 철저히 코미디 영화다. 굳이 분류하자며 블랙 코미디다. 그만큼 사회 비판적인 성격 또한 강하다.

등장인물부터 대부분 비정상적이다. 10만원짜리 수표를 펑펑 써대는 마태오(안재모) , 성기능 장애를 지닌 무명 화가인 유글레나(강성진) , 생리적 욕구만 추구하는 단순 무식한 아메바(박상면) 가 얘기를 끌고 간다.

여기에 군대를 탈영해 평생 도망다니는 거지(김명수) , 성당엔 열심히 다니나 속으론 여자만 밝히는 마태오의 아버지(박영규) , 전라도 사투리를 '징하게' 쓰는 청순 가련형의 수녀(명순미) 등이 가세하며 한바탕 씁쓸한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군대.경찰.종교.자본.가족 등으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억압적 구조를 역설법이란 고전적인 장치로 해부하는 것. 보기에 따라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구석이 있으나 시종일관 연속되는 익살스런 대사가 영화를 무겁지 않게 만든다.

보험 사기극을 다룬 '하면 된다' , 신용금고를 터는 대소동을 그린 '자카르타' 등을 잇는 막가파식 코미디지만, 표현 강도나 주제 의식은 훨씬 강렬하고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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