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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쇄신을 쇼로 만든 ‘돈 공천’ 의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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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남윤호
정치 데스크

국회의원도 ‘무노동·무임금’ 하자는 게 새누리당이었다. 개원이 늦어지자 새누리당 의원들은 정말 6월 한 달 세비를 일괄 반납했다. 새누리당은 이를 특권 내려놓기다, 쇄신이다 하며 은근히 과시했다.

 그런데 모양 참 우습게 돼버렸다. 억대 공천 청탁금 의혹이 불거졌으니 말이다. 진상은 검찰 수사에서 밝혀지겠지만, 구체적인 폭로와 증거물이 나오는 걸 보면 ‘지어낸 일’로 치부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공천 심사에 억 단위 현찰이 오가는 판에 그깟 한 달 세비 안 받은 게 뭐 대수인가. 국민들 눈엔 ‘썰렁한 개그쇼’로 비칠 뿐이다.

 게다가 돈을 줬다는 현영희 의원의 공천 과정에 대해 공천심사위원들은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한다. 당선권 밖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별로 신경 안 썼다는 얘기다. 하지만 기억이 남지 않을 정도의 존재감으로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됐다는 걸 누가 납득하겠나.

 그러다 보니 시중엔 별별 의혹이 다 돌아다닌다. 돈 뿌린 사람이 어디 한 사람뿐이겠나, 돈 받은 사람도 한 명뿐이겠어, 그럼 야당은 청정지대라 볼 수 있나…. 여기에 ‘아니다’고 답해 줄 정당이나 정치인이 누구인가. 참 서글픈, 우리 정치의 수준이다. 이러니 기성 정치에 대한 반감이 자꾸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런 부정은 주로 비례대표 공천에서 일어난다. 지역구에선 후보 개인의 지역기반과 당선 가능성이 억대의 현찰보다 중요하다. 이에 비해 비례대표는 공천권자 마음대로다. 공천 사유를 구체적으로 공개할 필요도 없다. 구조적으로 국민과 관계없이 당 내 정치의 산물로 정해질 소지가 크다. 18대 국회의원 선거 때도 공천 과정에서 돈 때문에 사달이 난 사례는 주로 비례대표였다. 미래희망연대와 민주당의 특별당비 수수, 신한국당의 당채(黨債) 매입이 다 비례대표 공천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들이었다. 원칙은 멀고 돈은 가까웠다고나 할까.

 물론 정당이 비례대표 후보를 고르는 데는 나름대로 명분과 기준이 있을 거다. 능력이 출중해서, 로열티가 강해서, 대표성이나 상징성의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해줘서…. 이 모두를 물리치고 돈을 우선시했다면 그 정당은 공당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셈이다. 수권(受權)을 표방하는 ‘수금(收金)정당’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거다.

 여기엔 제도 문제도 있다. 현행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지역구와 비례대표 후보자는 검증 절차가 다르다. 지역구 후보는 재산·소득·병역·범죄 등 검증에 필요한 각종 증명서류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내야 하지만 비례대표 후보는 명단만 내면 된다. 유권자로선 각 당의 비례대표 후보를 판단할 수 있는 기초자료가 처음부터 부족하다.

 그렇다면 제도적으로 비례대표 후보자에 대한 검증자료도 지역구 후보와 같은 수준으로 제출토록 하는 게 맞다. 나아가 ‘공천 실명제’도 고려해볼 만하다. 이 사람을 누가, 왜 후보로 내세우자고 했는지 사유서를 쓰게 하자는 얘기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공천권자가 “기억이 잘 안 난다”고 면피할 수가 없다.

 결과적으로 이번 일의 피해자는 한둘이 아니다. 당장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경선 후보가 직격탄을 맞았다. 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총선을 이끌었기에 그 과정에서 일어난 불상사의 책임도 그에게 돌아간다. 그가 전혀 몰랐다 해도 일정 부분 책임을 피하긴 어려워 보인다. 이는 박 후보 개인 차원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그가 대선 주자로 떠오른 이상 박근혜는 더 이상 개인이 아니다. 개인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실체다. 여기엔 이념, 세력, 지역, 이해관계, 이미지 등이 모두 응축돼 있다. 이 구성요소 모두가 이번에 골고루 상처를 입게 됐다.

 ‘돈 공천’의 피해자는 또 있다. 일반적으로 돈을 뿌린 사람은 뿌린 액수 이상으로 뽑으려 하는 법이다. 방법은 딱 하나, 이권 챙기기다. 그가 투자 회수를 위해 개입하는 곳마다 자원배분과 의사결정은 시장원리나 합리성을 벗어나 뒤틀리기 십상이다. 이로 인한 피해는 돌고 돌아 결국 국민들에게 돌아간다. 우리 정치의 참담한 수준을 목도한 국민들은 그런 피해를 내부 고발로 미연에 방지했다는 선에서 위안을 구해야 할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