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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안의 안철수, 안철수 안의 박근혜 찾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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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호 10면

불볕더위가 이어졌다. 말복으로 치달으면서 밤중까지 푹푹 쪄대는 통에 여름 나기가 하루하루 고역이었다. 아스팔트는 이글거리고 시민들은 녹초가 된다. 하필이면 이런 때, 여야 대선주자들이 경선을 치르고 있어 흥행과는 거리가 멀다. 런던 올림픽 기간이어서 더 그랬다. 올림픽이 끝나더라도 ‘주연만 있는 새누리 드라마’ ‘조연만 있는 통합민주 드라마’라서 시청률(?)이 잘 나오기란 애당초 글렀다고도 한다. 박근혜 대세론과 안철수 신드롬이 여야의 당내 경선을 맥 빠지게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꼭 그 둘 중 하나가 청와대 새 주인이 되라는 법은 없다. ‘거지 다음에 올 중’은 아직 가변적이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③

“할아버님! 듣다 보니 그 중, 개념 한번 알쏭달쏭하네요. 승려도 됐다가 민심을 파고든 후보도 됐다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요.”
외손자며느리가 얼음 띄운 오미자 화채를 내오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대선후보들이 낸 책들을 훑어보던 백두옹은 큼지막한 돋보기를 내려놓고 마른세수를 한다. 안철수의 생각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사람이 먼저다저녁이 있는 삶아래에서부터김문수는 말한다 같은 책들이 책상에 쌓여 있다.
“그 중이 그 중인 게야. 음(音)이 같으면 뜻도 같은 거니까.”

백두옹은 오미자 화채로 목을 축였다.

“어째서 그런 거죠?”
사십 대 후반 외손자며느리는 똑똑한 체는 다 하면서도 동양고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백두옹은 붓펜을 들어 이면지 위에 또박또박 적었다. 나이 탓에 손이 떨렸으므로 글씨는 꿈틀거렸다.

출가중(出家衆)
득중(得中)

“‘중’은 ‘출가중’의 준말이란다. 불도를 닦기 위해 집 떠난 무리, 대중을 뜻하지. 불교의 키워드가 중도(中道) 아닌가. ‘중’은 중도를 행하는 수행자들이란 말씀이야. 주역에서 말하는 득중은 여섯 개의 효 가운데서 2·5효로 각각 하괘, 상괘의 중심자리! 무리의 중심이지. 이때 1·3·5효는 양(陽)의 지위, 2·4·6효는 음(陰)의 지위인데 득중도 하고 지위도 음양에 걸맞으면 ‘중정(中正)’이라고 하거든. 대중(大中), 대정(大正)이라 중도로써 올바로 행하게 되는 게야. 아 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름도 바로 주역에서 따온 거야. 아, 그렇다고 정치적으로 중립이어야 한다는 건 아냐. 단테가 신곡에서 말했던가? 정치적 격변기에 중립을 지킨 자에게는 지옥에서 제일 뜨거운 자리가 배정된다고. 주역에서 말하는 득중은 비겁하게 중간에서 서성대는 게 아니거든.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필요한 곳을 정확히 찾아가는 거지. 때에 적합한 도리, 시중(時中)이라는 건데 그거 아주 어려워. 그거 잘하면 맹자처럼 준성인이야.”

“김대중 이름에 그런 뜻이 있었군요.”

외손자며느리는 중도나 시중이라는 철학용어보다 김대중의 이름이 주역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말에 더 흥미로워하는 눈치였다.

여성 대통령은 시기상조인가
“그런데 할아버님! 은강이 아빠는 우리나라가 아직 여성 대통령을 뽑기에 시기상조래요. 남북이 대치하고 있다고요.”
“허허허, 그 애가 정말 그랬다고? 이재오 의원이 그 말을 했다가 박근혜 후보에게 ‘21세기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분이 있느냐’고 한 방 얻어맞았지 아마?”

백두옹은 짓궂게 웃으며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은강이 아빠 은근히 마초적인 데가 있어요.”
“넌 그걸 멋지다고 생각하는 눈치던데?”
“사실 요즘 세상에 남자다운 남자 드물잖아요.”
“그래서 넌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게로구나. 특전사 출신이라고?”
“게다가 슈트가 잘 어울리는 남자거든요.”

외손자며느리의 눈가로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 눈가의 미소는 억지로 꾸밀 수가 없다. 감정을 속이고 조작 가능한 입가 미소근육과는 전연 다르다. 그래서 입이 아니라 눈으로 말할 때 진실에 더 가까운 거다. 아무튼 좌파 문재인이 강남 중년여성에게 이렇게도 어필할 수 있다는 게 새롭다.
“은강이 아빠는 김문수 지사 열성팬이지 않니? 대학 선후배지간이기도 하고.”

“우리 부부는 정치적으로 완전 상호 불간섭이에요, 할아버님. 선택 기준이 보수, 진보도 아니고 학연, 지연이라니. 그건 아니라고 봐요. 슈트가 잘 어울리는 남자! 얼마나 세련된 가치판단 기준이에요?”

그러면서 짐짓 우아한 몸짓을 해 보인다.
“아귀다툼 정치판에 너무 세련된 기준 같구나.”
백두옹은 진영논리로부터 자유로운 외손자며느리가 보기 좋았다.

“할아버님, 정치는 본래 갈등을 기반으로 먹고사는 거잖아요. 적대세력이 사라지면 그 순간, 정치인은 실업자로 전락해버리겠죠.”

“그래서?”
“여야가 드잡이하며 다투지만 사실은 서로 단짝이라고요. 상대와 대립각을 세우며 화려한 언변으로 실현 불가능한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죠. 결과는 피장파장! 국가와 국민을 생각하는 정치인이 몇이나 있겠어요. 국가와 국민을 생각한다고 자기최면 걸고는 뒤에서 도적질하더라고요. 비리의원 보호막 수단으로 써먹는
국회의원 불체포특권! 그거 코미디잖아요.”

낭만파라고 여겼더니 이런 정치혐오증이 있었다. 강남아줌마, 역시 녹록지 않다.

한반도, 공명정대 원리로 전환하는 시기
“얘야, 이번 대선을 계기로 정치풍토가 사뭇 달라질 게다. 머리 밝은 국민이 정도를 걷는 대통령을 뽑고 만들어갈 테니까 너무 냉소적으로 보진 마라.”
백두옹은 붓펜으로 쓱쓱 지도를 그렸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과 러시아, 일본열도, 호주, 태평양 건너 아메리카 대륙이 펼쳐졌다.
“봐라. 우리 한반도는 태평양으로 뻗어나가는 한 그루 생명나무야. 뿌리박고 있는 아시아 대륙은 흙이자 물이고 남극 쪽이 하늘이 되지. 사람으로 치면 우리 한반도는 소년(少年)이고 미국은 소녀(少女)거든. 꽃다운 소년 소녀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으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음양 충화로 이른바 동양과 서양, 간태(艮兌)의 합덕(合德)이라. 꽃다운 남녀 무리는 그 옛날 화랑도를 떠올리게 하지. 이들이 주축이 되어 바야흐로 새로운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이 싹틀 거라는 얘기야. 동서양 문화의 꽃과 열매지.”

백두옹은 대륙을 유기체와 사람으로 비유했다.

“탄허 스님 예언과 똑같네요.”
“네가 탄허를 어찌 아는고? 그 스님 날 여러 차례 찾아왔었지. 예전에 있었던 역우회(易友會)로 말야.”
“정말요?”
“이 나라 걸출한 인물들 가운데 나 모르고 간 이들 몇 안 돼.”

백두옹은 눈을 감고 왼손으로 알 듯 모를 듯한 수인(手印)을 지었다.
“하긴 할아버님께서는 우리 근현대사의 산증인이시니까요. 1910년 일제의 국권피탈부터 해방, 한국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을 고스란히 목격하셨죠.”
외손자며느리는 앙모하는 눈빛으로 백두옹을 우러렀다.
“목격만 한 건 아니지. 필요할 때마다 적임자를 만나 사명감을 불어넣어 줘왔거든. 대부분 사이비 교주 취급했다만 들을 건 다 듣더구나. 그게 어디 내 얘긴가? 탄허 스님 얘기도 아니고.”

“그럼 누구 말씀이라는 거예요?”
“대경대법(大經大法)이야.”
“네?”

“공명정대한 원리와 법칙이라고. 역리(易理)랄까, 역도(易道)랄까. 주역철학에 근거한 정역에 다 써놨어. 19세기 중반 때 이미 정리해 놓았다고. 뭐, 요샛말로 한반도 메시아 사상쯤으로 이해해도 될 거야. 너무 알려고 들지 마. 이상한 사람 취급 받으니까.”

“언제 그런 세상이 열린다는 거죠?”
“글쎄다. 혹자는 1984년 하원갑자(下元甲子)를 들던데 콕 짚어낼 수야 없지. 요즘 세월이 그 길목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1984년? 섬뜩해요. 조지 오웰의 소설에 등장하는 독재자 빅 브러더가 떠올라요. 요즘 세상에 메시아가 어디 있겠어요? 저는 박근혜와 안철수에게서 독선과 위선의 냄새를 맡거든요. 막연하고 공허한 희망보다 절망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편이 차라리 더 희망적이지 않을까요?”

외손자며느리는 여운이 미묘한 말을 남기고 방에서 나갔다. 백두옹은 물끄러미 뒤태를 응시했다. 인류가 걸어온 길, 희망보다 절망으로 난 길에 가까운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위대함은 절망 속에서도 끊임없이 새 역사를 써나가는 데 있다.

온갖 핍박과 고난의 연대를 건너온 땅, 한반도! 남의 나라 식민지 노예가 되고 동족끼리 피 흘리는 전쟁을 치르고 아직도 여전히 분단된 나라는 상처가 깊다.
그 상처들을 어루만질 리더십은 어머니의 품 같은 것이다. 분노와 질시가 아니라 포옹과 보살핌이다.

차기 대통령, 어머니 미덕 지녀야
백두옹은 역사의 이름으로 말한다. 다음 대통령은 분명 대지의 어머니, 곤(坤:
)의 미덕을 지닌 지도자 몫이다. 강건한 남성보다는 온유한 여성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뜸 박근혜 후보를 떠올릴 게다. 충분히 그럴 만하다. 그는 유력한 여성리더니까.

하지만 주역철학은 그렇게 표피적이거나 단순하지가 않다. 이 늙은이가 보기에 박근혜 의원은 음중양(陰中陽)이다. 겉모습은 여성이지만 내면에 누구보다도 강건한 남성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반대로 안철수 교수는 양중음(陽中陰)이다. 겉모습은 남성이지만 내면에 유순한 여성성을 품고 있다. 말소리며 머리 스타일, 행동양식이 모두 다소곳한 여인 같기만 하다. 요즘 사람들에게 씨알이 먹히는 서양학자의 이론으로 바꿔 말하자면, 남자 안에 있는 여성적 요소 양중음은 아니마(Anima)이고 여자 안에 있는 남성적 요소 음중양은 아니무스(Animus)인 셈인데 안철수와 박근혜는 그 이론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절묘한 역리요, 기가 막히게 부응하는 후보들 아닌가. 이것이 어찌 우연일꼬. 박근혜 안의 안철수, 안철수 안의 박근혜 찾기에 정치적 상상력을 발동해보자.



김종록 성균관대 한국철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밀리언셀러 『소설 풍수』와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바이칼』 등을 썼으며 중앙일보에 ‘붓다의 십자가’를 연재했다. 본지 객원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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