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유치 사진에 담긴 한국 기업가의 숙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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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호 22면

세계인의 축제 런던 올림픽 열기가 한창이다. 우리나라는 4일 밤까지 금메달 9개를 따내 당초 목표인 10위권 내 유지가 기대된다. 우리나라가 처음 올림픽에 참가한 것이 1948년 런던 올림픽이라 이런 호성적이 더욱 뜻깊다. 60여 년 전 해방 직후 찢어지게 가난했던 대한민국은 복권을 팔아 런던 올림픽 참가 경비를 댔다. 선수들은 여비를 아끼느라 배·기차·비행기를 갈아타면서 산 넘고 물 건너 20일의 고된 여정 끝에 현지에 도착했다.

런던 올림픽 隨想

얼마 전 가나다라 ABC라는 책을 한 권 펴냈다. 평생 기업과 재계에 몸담으면서 경험하고 느낀 바를 담았다. 독자 반응이 큰 대목 중의 하나가 고(故) 정주영 현대 회장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올림픽 한국 유치 일화다. 지난해 7월 남아공 더반에서 2016년 겨울 올림픽의 평창 유치가 확정되던 순간의 사진을 보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하다. 자크 로게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평창 개최를 선언한 순간을 담은 사진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국 측 유치위원장 등 우리나라 대표단은 환호와 흥분의 도가니였다. 사진 속에 이 회장도 있었다. 평창 올림픽을 유치하라는 특명을 국민한테서 받은 그다. 삼성과 이 회장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올림픽 유치에 크게 기여했으리라 짐작하긴 어렵지 않다. 그런데 사진 속 이 회장 모습은 두 팔을 번쩍 들어 만세를 외치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과 대조됐다. 미소를 머금은 채 조용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겨울올림픽 도전 3수 만에 강적 독일 뮌헨을 물리치고 이뤄낸 성과라 누구보다 더 기뻤을 텐데….

이 현장 사진을 빼닮은 사진이 또 하나 있다. 이로부터 30년 전인 1981년 9월 독일 바덴바덴의 24회 여름올림픽 개최지 발표 장면이다. ‘코리아’란 이름을 세계 무대에 본격적으로 알리고 한국의 경제발전 기틀이 된 서울 올림픽이 성사된 감격적인 자리였다.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쎄울(Seoul)’이라는 어색한 발음과 함께 포착된 발표 장면 사진, 한국 대표단의 환호 모습은 지난해 평창 유치 발표장 모습과 흡사했다. 정치·체육인 등 유치단 인사들이 두 팔을 들어올리며 환호하는 모습도 비슷했다. 당시 사진에도 유치위원장인 정 회장의 모습이 들어 있다. 올림픽 유치라는 역사적 대사에서 불세출 기업인 정 회장의 활약은 대단했다. 한국과 대만이 던진 두 표밖에 받지 못할 것이라는 국제 스포츠계의 비아냥을 보란 듯이 뭉개버렸다. 그런데도 사진 속의 정 회장 역시 조용하게 웃고만 있었다. 30년 뒤의 이 회장 모습과 흡사하다. 두 사람 모두 가장 큰일을 해냈을 때조차 감정을 절제하는 듯했다.

두 사진을 한번 찾아보시라. 두 사람의 모습을 한동안 보노라면 우리나라 기업가의 숙명이 느껴진다. 대개는 올림픽 유치라는 대단한 일을 마무리했을 때 이제 끝이구나 하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정주영과 이건희라는 인물에겐 그저 하나의 일이 끝났을 뿐 또 다른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맘껏 환호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또 다른 일에 도전하기 위한 기업인의 자기최면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 7위 수출국으로 성장했다. 올림픽 메달 순위 목표와 비슷한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지닌 나라가 됐다. 오징어 잡고, 가발 만들어 수출하던 나라에서 전자·자동차·석유화학과 첨단 정보기술(IT) 제품을 주로 수출하는 나라가 됐다. 경제로 치면 이미 올림픽을 두 번 이상 개최한 셈이다. 경제 금메달 또한 셀 수 없이 많이 땄다. 정주영·이건희, 고(故) 최종현 SK 회장 같은 경영 대가들은 경제 올림픽을 유치했다고, 경제 금메달을 많이 땄다고 자축 파티를 열진 않았다. 그들 눈에는 성공의 매순간이 새로운 출발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경제민주화가 시대의 화두다. 경제 올림픽 개최의 성과가 국민 전체에 골고루 퍼져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마땅히 그렇게 돼야 한다. 하지만 앞으로 또 다른 올림픽을 유치할, 그리고 숱한 경제 올림픽을 수시로 개최해 나갈 기업가들을 주눅들게 해선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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