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책] 김애란이 변했다, 발랄함 대신 아득함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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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배낭을 꾸려도, 안 꾸려도 좋습니다. 멀리 떠나든, 집에 머물던 중요하지 않습니다. 본격 여름휴가 시즌, 중앙일보와 교보문고가 함께하는 ‘이 달의 책’ 8월 주제는 ‘소설이 있는 휴가’입니다. 색깔과 무게가 각기 다른 신간 소설 세 권을 골랐습니다. 세상에 대한 눈을 키우고, 주변을 둘러보는 데 도움이 작품들입니다.

비행운
김애란 지음
문학과지성사
351쪽, 1만2000원

그래야 살 수 있겠지. 꿈이라도 꿔야, 꿈이 있다고 믿어야만 바짝 메마른 팍팍한 삶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김애란의 세 번째 소설집 『비행운』 속의 인물들은 불행하다. 비행운(非幸運)에 허우적대는 그들은 비행운(飛行雲) 너머의 꿈을, 새로운 삶을 동경한다. 작가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 어정쩡하게 흔들리는 그들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들은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타고 있다. 언제든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그들을 잠식한다.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그들을 어두운 심연으로 몰아 넣는다.

 책에 실린 단편 ‘서른’의 주인공이 대표적이다. 남자친구의 배신으로 ‘다단계 판매’ 조직에 발을 들인 주인공은 “자신이 팔고 있는 게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자조한다. 그러면서도 거기서 빠져 나오려고 학원 제자인 혜미를 끌어들인다. 빚에 시달리고 파탄 난 인간관계를 견디다 못한 혜미는 자살을 시도하고 결국 식물인간이 된다. 거짓으로 포장된 꿈이라도 믿고 싶었던 주인공은 ‘사람’을 판 채 절망한다. 그는 8차선 도로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막막하다.

[일러스트=강일구]

 ‘너의 여름은 어떠니’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인 서미영은 대학시절 좋아했던 남자 선배의 연락을 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선배를 만나러 간다. 하지만 케이블방송국에서 일하는 선배가 미영을 부른 것은 ‘먹기 대회 프로그램’에 뚱뚱한 미영을 엑스트라로 출연시키기 위해서였다.

 음식을 입에 밀어 넣는 미영은 참담하다. 어린 시절 물속에 빠진 자신을 구해줬던 친구의 장례식장에도 가지 않는다. 오히려 깊은 물속에서 느꼈던 공포를 떠올린다. 아무도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모른다는 고립감과 그걸 누구에게도 전하지 못한다는 갑갑함이다.

 외줄을 타는 사람에게 기대와 꿈은 사치다. 세상에 그들의 자리는 없다. 단편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의 주인공인 택시기사 용대는 조선족 여성 명화를 만나 결혼하고 중국에서 새 인생을 꿈꾸며 중국어를 공부했다. 행복은 찰나였다. 명화가 위암으로 몇 달 만에 죽고 그의 꿈은 사그라진다. 용대는 주문처럼 되뇐다. “제자리는 어디입니까(我的座位在<54EA><513F>). 여기서 멉니까(離這里遠<55CE>).”

 아득한 꿈은 잡히지 않는다. 잡으려 할수록 더 멀리 달아난다. 그래서 그들은 더 절망한다. 단편 ‘호텔 니약 따’에서 주인공과 헤어진 남자친구는 ‘자신을 만나 불행했냐’고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힘든 건 불행이 아니라……행복을 기다리는 게 지겨운 거였어”라고. 불행을 견딜 동력이 사라져버린 그들은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절망적인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요리해낸 김애란 특유의 재기 발랄함과 능청스러움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발랄함으로 에둘렀던 변화구 대신 김애란이 던진 묵직한 직구를 받아 든 맛도 괜찮았다. 삶을 늘 능청스러운 유머로만 지켜보기엔 일상이 때론 더 무겁다는 걸 깨달은 작가의 성숙이 느껴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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