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휴전 60년을 넘어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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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는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3년여에 걸쳐 한반도를 피로 물들였던 전쟁이 일단 멈춘 것이다. 내년은 휴전 60년을 맞는 해다. 그러나 과연 한국전쟁은 마무리되고 있는가. 지난 60년 동안 한반도에서는 남북이 언제나 다시 싸울 수 있는 임전태세가 일상화된 긴장이 지속되어 왔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이 불안정한 휴전상태를 역력히 보여주지 않았는가. 이제라도 휴전 60년을 되돌아보며 분단의 대결상태를 어떻게든 평화통일을 향한 방향전환의 계기로 삼는 특단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마침 금년은 한반도 문제와 직결된 모든 당사국들이 새로운 리더십을 출범시키는 드문 기회를 맞고 있다. 북한 김정은의 권력승계로부터 러시아 푸틴의 권좌 복귀, 중국의 새 지도자 시진핑의 등극, 미국의 11월 대선과 12월의 한국 대통령선거, 그리고 연내로 예상되는 일본의 총선 등 정치리더십의 동시변동과 그에 따른 연쇄반응은 필경 한반도 문제를 비롯한 국제적 과제 해결의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갈 것이다. 차제에 한반도 문제를 해결의 궤도에 올릴 수만 있다면 근래에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고 있는 미·중 관계가 2차 냉전으로 진전되는 것을 예방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할 것이다. 20년 전 미·소 냉전의 막이 내려가던 역사적 전환기에 통일의 계기를 아쉽게 놓쳐버렸던 우리로서는 이번에야말로 적극적인 자세로 분단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하겠다.

 민족통일을 위한 새로운 방안과 전략을 창출하고 집행하는 주체는 바로 우리 국민, 특히 정치이므로 대선을 맞은 여야 정당과 대통령 후보들은 새 통일정책 및 전략구상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마땅하다. 다만 계획하는 통일정책이 국내외에서 효율적으로 추진되려면 여러 정치세력의 광범위한 이해와 동의가 필수임을 명심해야 한다. 통일에 성공한 독일의 정치권이 이미 모범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큰 목소리의 공개토론보다는 조용히 섬세한 로드맵을 그리는 충실한 작업을 기대하면서 그 과정에서 고려될 수 있는 몇 가지 논제를 제시하여 본다.

 냉전의 종식과 민주화의 성공을 동시에 경험한 20년 전 한국이 주도하였던 일련의 남북관계 진전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1989년 광범위한 국민적 논의와 여야 합의로 확정된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통일을 위한 평화적이며 점진적인 남북의 공동전진을 처방하는 새 원칙을 명시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두 국가체제가 한반도에서 공존하는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민족통일과 그에 걸맞은 단일국가 수립을 향하여 남북이 함께 나아가자는 제의였다. 다행히도 북측이 이에 긍정적으로 호응하여 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였으며 유엔에 동시가입함으로써 국제적인 동조도 얻어낼 수 있었다. 그 후 북한의 핵개발 문제로 불거진 위기에 봉착하였으나 사태 해결의 물꼬를 터준 94년 6월 김일성과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회담에 힘입어 남과 북은 7월 25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열어 분단 극복 및 상호협력의 방도를 함께 찾기로 합의했었다.

 이러한 남북협조의 흐름은 고르바초프의 러시아와 덩샤오핑이 이끄는 중국의 개방과 개혁이란 세계사적 변환에 한반도가 예외지대로 남을 수 없다는 남북의 판단이 밑받침하고 있었다. 그러나 94년 7월 8일 갑작스러운 김일성의 죽음은 역사의 순항과 남북공조의 희망을 한꺼번에 좌절시켜 버렸다. 그로부터 비롯된 지난 18년에 걸친 남북 간의 우여곡절이나 시비를 넘어 남북한과 관계 당사국들의 새 리더십이 내년에 당면할 과제는 중단되었던 남북공조의 틀을 어떻게 평화통일의 궤도에서 되찾느냐는 것이다. 북한의 김정은이 개방과 개혁의 문을 열기 위해 김일성의 입장을 이어받길 기대하며 12월에 당선될 우리의 새 대통령은 과감히 새 전략적 선택에 임해야 될 것이다. 지난주 한반도포럼이 내놓은 ‘남북관계 3.0’(중앙일보 7월 24일)과 같은 창의적인 제안을 신중히 검토하는 긍정적 자세를 기대하게 된다.

 민족공동체통일방안과 유엔 동시가입의 논리적 연장선에서 20년 늦게나마 북·미 및 북·일 국교 정상화를 위해 교차승인을 완료하는 것, 남북 간의 군사적 균형과 국제사회의 여망에 부응하는 데 필수적인 북한의 비핵화를 20년 전 김일성과 최고인민회의가 우리와 함께 승인했던 비핵화공동선언을 바탕으로 실천하는 것, 그리고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치하여 한반도 분단문제 해결을 통한 동아시아 평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 등 진취적인 정책수립과 국론조성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내년 7월 27일 휴전 60주년 기념행사를 주관하게 될 새 대통령이 심사숙고해야 할 과제임이 틀림없다.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