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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경제민주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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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

경제민주화란 말이 우리 사회의 큰 화두로 떠올랐다. 각 진영의 대선 후보들이 모두 이를 주요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그러나 일반 국민은 이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잘 모르고 있다. 경제학을 40년 공부한 필자도 사실 그 뜻을 잘 모른다. 이 말은 과거 쓴 이에 따라 여러 다른 뜻을 내포해 왔다. 페이비언협회를 창시해 영국 사회주의운동의 주류를 이루고 노동당 창설의 핵심 강령을 제공한 시드니 웨브는 이 말을 통해 혁명이 아닌 의회에 의한 점진적 개혁으로 소비자가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상정해 왔다. 반면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인 미제스는 소비자가 각자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시장에서 가격을 결정하는 자유시장체제를, 또 다른 이들은 주주뿐만 아니라 근로자·고객·공급자 등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기업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제도를 주장하며 이 말을 써 왔다.

 과거 우리 사회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별다른 성과나 진전도 없이 사회적 에너지만 소모하고 사라진 말이 많다. ‘제2건국’ ‘역사 바로 세우기’ ‘공정사회’ 등이 그중에 포함될 것 같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말들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국민도 잘 모르고, 아마도 그것을 추진하려 했던 사람들도 잘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경제민주화란 말이 이번 대선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이상 우리 국민은 도대체 이 말을 통해 정당과 대선 후보들이 구체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권리가 있다. 상대는 사과 맛을 얘기하는데 나는 오렌지 맛을 상상하고 있으면 거기서 의미 있는 논쟁도 결정도 나올 수 없다. 경제민주화란 말은 시장자유주의, 사회주의, 혹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등 어떤 체제의 추구도 위장할 수 있는 언어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에서 경제민주화를 말하면서 나오는 쟁점은 크게 재벌 개혁과 복지 확대다. 재벌 개혁은 과거 거의 모든 정부가 들고 나왔던 문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업종 전문화, 그룹 비서실 해체, 출자총액제한 등 여러 규제가 출현했다가 지금은 거의 도로 원점으로 돌아와 있다. 그만큼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했거나 상대의 저항이 끈질기며 조직적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후보와 정당은 새로운 규제를 도입하기보다 재벌과 대기업이 의식전환을 해 스스로 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 제도와 법이 변하지 않는데 어떻게 기업의 행태가 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기업은 시장에서 실적에 의해 평가받는다. 영업이익이 떨어지면 주가도 떨어지고, 신용등급도 떨어진다. 어떻게든 납품가를 낮추고 이익을 많이 올려야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싸게 자금을 끌어올 수 있으며 더 많은 투자도 할 수 있다. 대기업 행태가 바뀌려면 시장의 평가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 주식시장, 신용평가, 금융감독, 나아가 소액주주의 요구 등 시장환경 전반이 변해야 한다. 시장이 글로벌화한 상황에서는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같은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을진대 대기업 스스로 변해야 한다는 주장은 결국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재벌에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면을 바꾸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정해져야 한다. 이에 따라 관련 규제와 법이 바뀌어야 하고, 또 이것이 일관되게 추진돼야 한다. 순환출자, 기업 인수합병 제도, 계열사 간 지원에 대한 감시구조 등 소유지배구조에 대한 정교한 제도 개편 없이 재벌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법을 엄격히 적용하겠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구조를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방안도 나와야 한다.

 복지 확대는 필요하다. 그러나 범위와 속도가 중요한 쟁점이다. 우리는 고령화로 인해 추가적 제도 확대 없이도 향후 복지지출이 빠르게 늘어나게 돼 있다. 결국 재원이 감당할 수 없는 복지 확대가 무엇인지 가려내는 것이 주요 쟁점이 돼야 한다. 복지혜택은 늘리기는 쉬워도 거둬들이기는 지극히 어렵다는 것을 유럽의 경험이 잘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지금 당장뿐 아니라 장기적 세수 전망, 경제성장률 등도 토론 대상이 돼야 하는 것이다.

 정당과 대선 주자들은 모호한 구호 뒤에 스스로의 생각을 숨기거나 혹은 아무 비전도 없음을 감추려 하지 말고, 보다 명확한 언어와 구체적 대안으로 국민에게 다가와야 할 것이다. 5년 전 대선에서는 친(親)기업, 747, 줄푸세가 주도적 화두였다. 민심과 여론은 무상한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구체적 방안과 계획이 지금 없으면 5년 후의 자리는 지금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