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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 살인사건 끔찍하지만 CCTV는 처방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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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국내에도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미국 저술가 빌 브라이슨(61)은 1996년 3월 9일 미국 조지아주 스프링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북쪽 메인주의 마운트 캐터딘. 약 3500㎞에 이르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시작한 것이다.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객은 ‘트루 하이커(Thru-Hiker)’로 불린다. 매년 봄 2000여 명이 스프링어를 출발한다. 코스에는 1500m를 넘는 봉우리가 350개나 있다. 완주까지 최소한 5개월에 걸쳐 총 500만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도전자의 20%는 첫 주에 포기하며, 절반은 전체 거리의 3분의 1도 안 되는 버지니아주 중부에 도달하지 못한다. 완주에 성공하는 사람은 겨우 10%. 40대 중반이던 브라이슨도 나름 악전고투했지만 1392㎞를 걸은 후 야망을 접었다. 그래도 소득은 컸다. “텐트 칠 줄도 알게 됐고, 별빛 아래서 자는 것도 배웠다. 몸이 날렵하고 튼튼해졌다. 삼림과 자연, 그리고 숲의 온화한 힘에 대해 깊은 존경을 느꼈다”(『나를 부르는 숲』·빌 브라이슨).

 1937년 완공된 애팔래치아 트레일에서는 1974년 이후 브라이슨이 종주에 나선 96년까지 22년간 모두 9명이 살인사건에 희생됐다. 그러나 브라이슨은 “미국을 가로질러 어느 각도에서든 3200㎞의 줄을 긋는다고 해도 9명의 살인 희생자가 나오게 돼 있다”고 보았다. 지금도 많은 미국인이 곰·퓨마·저체온증의 위험을 무릅쓰고 트레일에 도전한다. 『나를 부르는 숲』을 한국어로 번역한 이가 자전거 여행가인 홍은택(49)씨라는 인연이 흥미롭다. 홍씨는 자전거로 80일간 6400㎞를 달려 미국 대륙을 횡단했고, 요즘은 중국을 누비며 중앙SUNDAY에 ‘홍은택의 중국 만리장정’을 연재하고 있다.

 빌 브라이슨이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도전한 지 꼭 10년 후인 2006년 9월 5일 한국의 전직 기자 서명숙(55)씨가 유럽행 비행기에 올랐다. 800㎞의 산티아고 길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서씨는 완주에 성공했고, 체험을 토대로 대한민국에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전국적인 걷기 열풍을 몰고 온 ‘제주 올레’였다. 올레길은 2007년 9월 제1코스를 개장한 이래 총 21개 코스로 다듬어졌다. 18㎞짜리 마지막 제21코스는 9월 15일 개장한다.

 그 올레길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수법으로 보아 범인은 사이코패스인 듯하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어제 기자회견을 열고 올레길 안전대책을 발표했다. 여행자 본인, 코스 관리자 모두 안전에 유의해야겠지만 의도를 갖고 노리는 사이코패스까지 완벽하게 막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올레길마저 인공시설로 뒤덮이면 더 이상 올레가 아니다. 나는 100m마다 경찰이 서 있고 곳곳에서 CCTV가 지켜보는 올레길은 원하지 않는다.

글=노재현 기자
사진=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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