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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 산신이 찾는 정도령! 메시아 같은 그는 누굴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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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호 03면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별.
청와대 뒷산 북악은 별 같은 산이다. 해맑은 날, 광화문 광장에서 북악을 우러러 보라. 영험하고 청수한 기운이 뻗친다. 가히 천하제일복지답다. 세계 어느 나라 수도 중심에 이런 명산이 있는가. 경복궁 궐내를 거닐어 북문 신무문(神武門)을 나서면 곧바로 청와대 본관이 보인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이 산업화와 민주화의 기적을 이끌어 냈던 장소다. 나라는 융창했는데 유감스럽게도 대통령들의 말년은 비참했다.
이를 두고 잡술 서적 몇 줄 읽은 속사(俗士)들은 이 복된 터를 탓해 왔다. 북악이 무정하게 동쪽으로 고개를 돌렸느니, 지기가 다했느니, 산신의 영역까지 너무 깊게 파고들어서 노했다느니 온갖 참언으로 쑥덕공론을 즐겼다. 가당찮은 잡설이다. 터가 나쁜 탓에 대통령은 불행하고 나라는 온 세계가 놀랄 정도로 눈부시게 발전했더란 말인가. 그렇다면 멸사봉공의 터가 되는 거지, 왜 나쁜 터란 말인가.
인왕산 산책로에서 동쪽 청와대 터를 건너다보라. 탄성이 절로 나오는 명당이 틀림없다. 터가 문제가 아니라 공간 구성이 문제고 들어가 사는 사람들의 심보가 문제 아니었을까.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은 저마다 업적도 컸지만 과오도 컸다. 대통령 자신도 그랬지만 친·인척이나 비서진, 측근들의 비리가 끊임없었다. 그렇다면 최고 권력을 쥔 자들이 누린 탐욕의 대가를 응당 치른 것이므로 터를 탓할 일이 아니다. 퇴임 후에도 국부로 존경받는 대통령이 나오게 되면 청와대 터의 오명은 그날로 말끔히 씻길 것이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①

한반도는 終萬物 始萬物의 땅
“그 화상 누군지 입바른 소리 한번 잘한다!”
산책로를 거닐던 백두옹(白頭翁)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걸음을 멈췄다. 이 음성은 분명 속기가 빠진 자의 것이었다. 그는 노안을 조이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무심히 지나가는 등산객들뿐 주인공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공중을 건너가는 바람 소린가. 백두옹은 이내 바위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인구 천만 거대 도시의 빌딩숲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개화기의 초라했던 거리 풍경과 한국전쟁 때의 포연 짙은 폐허를 떠올렸다. 돌아보면 옛 선인들이 일렀던 개벽의 땅이 바로 이곳 서울이다.

“들을지어다. 나는 북악의 진국백(鎭國伯)이니라.”
“아, 국사당 산신님!”

백두옹은 북악을 향해 몸을 곧추세웠다. 120세란 두 갑자의 세월을 떠받쳐 온 등은 다소 굽어 있었지만 귀에 걸칠 정도로 길게 자란 흰 눈썹 밑으로 눈빛이 번뜩였다.

“백두옹 자네. 왜 이제야 왔는고?”
“굳이 제가 나서지 않아도 국운이 좋았는걸요.”
“한데 왜 늙어 꼬부라져서야 나타나 청승을 떠누?”
주역(周易)에서 말한 약속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새로운 문명의 꽃이 한반도에서 피어난다는 그 약속 말입니다.”
“종만물 시만물(終萬物始萬物)의 땅?”
“그렇습니다. 한반도는 인류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의 백화점이자 새로운 사상과 조류를 빚어내는 용광로니까요. 불과 30년 전만 해도 허황하다며 시큰둥하더니 요즘에는 제법 귀를 기울입니다.”

백두옹은 한국전쟁 후 유엔 구호물자와 식량으로 연명하던 나라가 세계 일곱 번째 교역대국으로 발돋움한 현대사를 꿈결처럼 더듬었다. 그리고 이제는 한류가 세계를 휩쓸고 있었다.
“그래서 감격스럽게 서울 도심을 조망한 게야?”
“내심 걱정도 큽니다.”
“내가 걱정이지 이녁이 무슨 걱정? 친형을 감옥에 보낸 청와대 주인장의 깊은 시름이 내 시름일세.”
북악 산신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MB는 마지막 구시대 대통령이 될 겁니다. 머리 밝은 국민들이 다양한 SNS를 통해 뒤틀린 제도권 정치권력을 무력화시키고 있어요. 국민들의 높은 기대치를 효과적으로 수용할 지도자가 필요한데 지금으로선 누가 돼도 걱정이 태산이로군요.”
백두옹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내 고민이 바로 그거야. 나는 정도령을 찾고 있느니. 새 시대, 새 나라를 열어 갈 새로운 국가 리더십 말일세. 입에 참기름 바른 정치 구호가 아니라 진심으로 나라 생각, 국민 생각, 겨레 생각하며 비전을 제시하는 대통령이 청와대 주인으로 들어와 주었으면 좋겠어. 그놈의 터가 나쁘단 소린 다시 듣고 싶지 않아. 그대 말마따나 국가의 명운이 달린 아주 중요한 시기야. 여태까지는 국민총화에 행운까지 더해 이만큼 성장해 왔지만 앞으로는 오리무중이야.”
북악 산신의 목소리는 시름겨웠다.

“그런데 웬 정도령 타령을 하세요? 정감록이니 격암유록이니 하는 예언서들은 진작 용도 폐기된 위서(僞書)들입니다.”
“이런 답답한 화상 같으니. 공부가 깊은 줄 알았더니만…. 역시 인간의 어법과 신의 어법은 다르구나. 너는 정도령의 진짜 의미를 아직도 모르고 있다. 그나마 청와대 터가 천하제일복지라고 인정하고 주역을 좀 읽었다니 함께 대권을 논할 수는 있으려나? 너는 필시 주역으로 이번 대권을 저울질하려고 하렷다!”

“그렇습니다. 주역 그리고 한국 역학인 정역(正易)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가치관의 대전환기가 시작되었어요. 국가권력 주도의 사회, 승자독식 자본주의는 끝났습니다. 남녀 양성평등 사회가 돼가면서 여성 리더들이 급부상하고 있어요. 주역과 정역의 변화원리 그대로입니다. 이번 대선은 주역 철학을 확실한 나침반으로 쓸 수 있습니다.”

12월 19일은 용띠해 호랑이날
백두옹의 머릿속으로 대선 주자들의 면면과 64괘가 오버랩되었다. 박근혜, 안철수, 문재인, 손학규, 김문수, 김두관, 김태호, 정세균….
그들은 모두 중요한 시대에 태어난 인물들이다. 중요한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 얼핏 축복으로 들리지만 지독한 저주다. 인류사를 훑어보면 중요한 시대에 태어난 자, 하나같이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영혼의 심지를 바짝바짝 태웠다. 이번 대선은 능력자의 몫이다. 단지 권력욕에 눈멀어 어물쩍 취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를 판이다.

18대 대권!
손에 쥐어 줘도 슬그머니 내려놓아야 할 신물(神物) 같은 것. 양극화 해소를 위한 경제민주화, 성장과 복지, 남북화해 그리고 국위선양! 개념은 제대로 잡히는가. 해법은 정말 있는 것인가? 골치가 지끈지끈 아프다.

대저 축복받은 인생이란 임금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국경이 어디까지인지 알 바 없이 그저 한가로이 밭고랑 갈고 흙덩이 깨며 노래 부르던 이들이었다. 날이 저물어 지등(紙燈) 같은 달이 뜨면 베잠방이에 이슬 적시며 집으로 돌아온다. 양친부모 모시고 처자식과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토장국에 보리밥 말아먹던 목가적인 풍경은 그야말로 아주 사소한 시대의 흔해 빠진 풍속도였다. 따지고 보면 그게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다. 도시 문명의 한복판에서 애면글면 사는 이들은 그 시절로 영영 돌아가지 못하리.

“내가 너에게 큰 붓을 주련다. 맘껏 휘둘러서 청와대 터에 맞는 주인공을 가려라. 그리하여 오는 12월 19일 호랑이날, 국민과 함께 신명이 내린 자의 입에 여의주를 물려라. 춤추는 그 용이 동방의 하늘을 날면 온 천하가 떨쳐 일어나 호응하리라. 그가 바로 반만 년을 기다려온 정도령이니라.”
그때 먹장구름이 삽시에 몰려들면서 번개가 하늘을 갈가리 찢었다. 그 모습이 흡사 성난 독룡의 혓바닥과 같았다. 귀청을 때리는 천둥이 몇 차례 울더니 후두두 장대비가 쏟아졌다. 백두옹은 태백산 오래된 주목(朱木)처럼 서서 그 비를 흠뻑 맞았다.
“한 가지 명심할 지어다! 지금까진 내가 꾹꾹 참아왔다만 또다시 함량미달인 자, 탐욕스러운 자가 청와대 주인 행세하겠다고 들어올 것 같으면 이번엔 가차 없이 불을 뿜어 주살(誅殺)하리라!”

건괘 다섯 번째 지위가 飛龍在天
요란한 장대비 소리와 뒤섞인 그 음성은 소름이 끼쳤다. 앞을 분간조차 할 수 없는 폭우를 맞고 서서 백두옹은 불현듯 용을 떠올렸다.
용은 상상의 동물이다.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코는 돼지, 귀는 소, 몸통은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한데 변신의 귀재였다. 마음대로 변하지 못하면 용이 아니었다. 때로는 산, 때로는 물, 때로는 불이 되었다가 사람의 형상을 취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아까 나에게 말한 북악 산신 또한 용일 수도 있었다.

동양문화에서 용은 상서로운 영물이자 왕을 뜻한다. 목 아래에 거꾸로 박힌 비늘, 역린(逆鱗)이 있는데 이것을 건드리면 누가 됐건 사정없이 물어 죽여 버린다. 왕조시절, 제왕의 심기를 건드린 자 또한 목숨을 보전키 어려웠다.

우리는 대선 후보를 잠룡(潛龍)이라고 부른다. 잠룡은 주역 건(乾)괘 여섯 개의 효(爻:가로 그은 획) 중 맨 아래 지위다. 출마 선언을 하면 어느 정도 실체가 드러났으므로 두 번째 지위인 현룡(見龍)이 된다. 대통령 하겠다고 나선대서 아무나 불러다 쓸 수는 없다. 리더십을 검증받고 지위를 얻은 다음에야 비로소 쓸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을 뜻하는 건괘 다섯 번째 지위는 비룡재천(飛龍在天)이다. 하늘을 나는 용이니 대권을 거머쥔 대인을 뜻한다. 맨 위까지 올라가 권력을 다하게 되면 항룡(亢龍)으로 후회할 일만 남게 된다. MB의 친형 이상득 전 의원은 일찍부터 항간에 만사형통(萬事兄通:모든 일은 형과 통한다)이라는 백만 달러짜리 신조어를 낳았는데 그 말로(末路)는 1.9평짜리 감옥행이었다.

북악 산신이 찾는다는 정도령! 메시아 같은 그는 누굴까? 여야의 잠룡, 현룡들 가운데 정씨가 하나 있긴 하지만 너무 까마득하여 족탈불급이다. 현재 가장 유력한 대선 주자는 누가 뭐래도 박근혜 후보인데 엉뚱한 도령이라니? 도령은 총각을 대접하는 말, 그렇다면 박근혜 후보는 아니라는 말인가?



김종록 작가는 성균관대 한국철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밀리언셀러 『소설 풍수』와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바이칼』 등을 썼으며 중앙일보에 ‘붓다의 십자가’를 연재했다. 본지 객원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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