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4일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의 재가동을 승인했다. 정전 사고 은폐 사실이 밝혀져 3월 12일 가동이 정지된 지 넉 달 만이다. 정부는 일단 지역 주민의 반발 등을 감안해 당장 가동하지는 않을 계획이다. 지난달엔 서울 등 7대 도시에서 정전 대비 민방위훈련이 시행됐다. 국민이 전력 수급까지 걱정해야 하는 ‘불편한 시대’다. 본지는 박종배 건국대 전기공학과 교수, 심대섭 한국전력거래소 전력계획처장, 황일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정한경 에너지경제연구원 전력정책연구실장 등 전력·에너지 전문가의 조언을 들었다. 전문가 좌담은 지난달 29일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조성경 명지대 기초교육대학 교수의 사회로 진행됐다.
▶사회(조성경 명지대 기초교육대학 교수): 전력 수급 상태가 얼마나 안 좋은가.
▶심대섭 한국전력거래소 전력계획처장(이하 심): 지난봄 전력 예비력이 450만㎾까지 내려갔다. 목표 예비력은 500만㎾인데 그 이하로 내려간 것이다. 올해 봄 평균기온이 예년보다 섭씨 4도 올라간 탓이 크다. 전력 수요는 증가했지만 고리1호기, 울진·보령 원전 등이 가동을 멈추면서 공급은 줄었다. 올여름 전력 최대 수요가 예측치까지 올라가면 전력 예비율은 1.9%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예비율이 10%는 돼야 안정적이다. 비상사태다.
▶박종배 건국대 전기공학과 교수(이하 박): 정부 예측대로 전력 수요가 변하면 2014년 이후엔 전력 예비율이 16~17%까지 회복된다. 하지만 요즘처럼 수요가 급격히 올라간다면 위기는 2014년 이후까지 계속될 수 있다.
▶정한경 에너지경제연구원 전력정책연구실장(이하 정): 지금 추세대로 수요가 변한다면 2014년까지는 목표 전력 예비율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올겨울과 내년 여름 위기가 가장 클 것이다
▶사회: 블랙아웃 가능성은.
▶심: 지난해 9월 정전 사태를 계기로 예비 전력 단계별 대책을 마련했다. 올해는 블랙아웃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블랙아웃이 일어나면 복구 기한을 감안했을 때 국내총생산(GDP)에 11조6000억원 정도 악영향을 준다. 이에 대비한 조치는 마련돼 있으니 안심해도 된다.
▶정: 블랙아웃 확률은 0%에 가깝다. 최악 상황이 오더라도 지역별로 돌아가며 전기를 끊으면 된다. 지난해엔 수요 예측부터 잘못됐었다. 관계 기관 공조체계도 작동되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는 단전을 해도 해당 지역에 사전 통보하도록 돼 있기 때문에 피해가 크지 않을 것이다.
▶사회: 수요 예측을 잘못해 위기가 온 건 아닌가.
▶심: 2006년 예측한 수요 증가율은 연평균 2.3%다. 하지만 실제론 매년 4.4%씩 늘었다. 같은 기간 전력 설비용량 증가 계획보다 0.5%포인트 높다. 전기요금이 싸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발전소 설치에 대한 해당 지역 반대가 심해 그동안 전력 공급을 늘리기 어려웠던 것도 원인이다.
▶정: 지난 10년간 전력 사용량 증가율이 경제성장률보다 2%포인트 높았다. 6년 넘도록 석유값보다 전기요금이 싼 상황이 지속된 탓이 크다. 사람들은 석유 보일러 대신 전기 난방을 선호한다. 비닐하우스에도 면세유로 난방하는 것보다 전기 난방이 싸다. 전기는 가장 비싼 에너지라는 인식이 자리 잡아야 한다.
▶박: 강력한 수요 관리, 전기요금 정상화가 함께 이뤄질 거라는 가정에서 나온 예측이었으니 틀릴 수밖에 없었다. 정부가 일정 주기마다 전기요금을 올리고 다양한 수요 관리를 했다면 요즘 같은 블랙아웃 위기는 없었을 것이다.
▶황일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이하 황): 우리나라 전기요금 왜곡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학교마다 천장에 전기 히터를 다는 붐이 생긴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가 냉·난방용과 농업용 전기 등을 용도별로 구분해 관리하려는 노력도 없었다.
▶사회: 전력 수요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나.
▶정: ‘전기는 다른 에너지원보다 비싸다’는 원칙이 지켜지면 수요 예측이 틀릴 이유가 없다. 그런데 지금은 그 원칙이 없다.
▶박: 올해는 수요 예측이 정말 힘들 것이다. 기존 기법으로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 한다. 최근처럼 예상하지 못한 수요가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사회: 전력 수요 관리에 가장 필요한 수단은.
▶심: 지난해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 일본 국민은 23%의 에너지 절약 성과를 냈다. 우리 정부도 국민에게 에너지 절약을 당부하지만 상점은 문을 연 채 에어컨을 켠다. 우리의 수요 예측이 틀리고 관련 계획을 잘 이행하지 못해 전력 수급 차질이 빚어지는 것은 반성한다. 하지만 국민도 절전 노력을 해야 한다. 에어컨 온도를 2도만 낮춰도 순간 전력 70만㎾를 절약할 수 있다.
▶정: 전기요금 저가 정책부터 바꿔야 한다. “전기 절약하라”며 정부가 지원금을 주는 것도 문제다. 전기료가 낮은데 거기에 지원금까지 주면 총투입 비용은 더 많아지는 것이다.
▶사회: 가격으로만 전력 수요를 관리할 수 있나.
▶정: 가격 정상화가 대전제다. 그 다음 부족한 대책에 처방을 내리는 게 합당하다.
▶박: 지금까지는 전기가 부족하면 발전소를 지어 공급해 왔다. 이제는 스마트그리드, 요금 조절 등 수요 관리 중심의 전기에너지 정책으로 바뀌어야 한다.
▶사회: 전기요금이 정상화되지 않는 이유는.
▶정: 전기요금 결정 기관의 독립성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사실상 지식경제부 장관이 요금을 결정한다. 규정에는 없지만 당정 협의를 해야 할 때도 있고, 청와대까지 개입한다.
▶심: 그래서 우선 선거의 영향을 덜 받는 산업용 전기요금 정상화 방안부터 논의해야 한다.
▶사회: 고리원전 1호기 재가동 논의가 나온다.
▶황: 무엇보다 ‘당국이 현명하고 안전한 조치를 내린다’는 국민 공감을 얻는 게 우선이다.
▶박: 이번 여름엔 안전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 다음 가을부터 가동하는 게 맞다.
▶심: 60만㎾ 짜리 고리 1호기는 올여름 꼭 필요한 설비다. 안전 점검을 강화해 꼭 가동했으면 좋겠다. 지금 싼 전기를 쓸 수 있는 원동력은 원전이다. 전기가 100원이라면 원전의 발전원가는 40원, 석탄은 60원, LNG는 120원 정도다.
▶정: 국민이 재가동 결정을 신뢰할 수 있도록 지자체 의견도 반영하는 게 중요하다. 단순히 이번 여름 전력 수급만을 생각할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