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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닮은 또 다른 작은 나 … 프랙털 구조로 보면 사회와 학교 모두 병들어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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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오래 같이 살면 외모마저 서로 닮아가는 걸까. 나와 아내의 얼굴이 많이 닮았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의문이 생기면서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벌써 결혼 18년 동안 밥상을 같이하면서 먹는 것도 같은 데다 세월의 풍파에 마모돼 비슷하게 깎이고 파이다 보니 외모마저도 비슷해져 가나 보다.

 생판 남이었던 사람끼리 닮을 정도라면 자기 복제와 같은 닮음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눈을 돌려 주변을 보자. 한낮 달궈진 대지 위에 펼쳐진 뭉게구름에서도, 저녁 회식 자리의 고기 불판 옆에 놓인 상추의 주름에서도 닮음의 모양은 발견된다. 부분이 전체를 닮고, 그런 닮음의 과정이 무한히 반복되는 프랙털(fractal) 구조는 자연은 물론 인간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나’라는 전체는 또 다른 ‘작은 나’로 무수히 나눠지는 기하학적 구조다.

 그래서 전체 구조에 이상이 생기면 그 이상의 징후는 부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역(逆)도 가능하다. 오장육부의 이상 증세를 손바닥에서 감지할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원리다. 같은 원리를 적용한다면 지금 우리의 아이들이 겪고 있는 문제는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에 맞닿아 있음을 직감할 수 있어야 한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 살면서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아이의 경쟁, 그리고 부모의 경쟁이란 레이스에 몸담았다. ‘좋은 학교 보내려면 어쩔 수 없지’라는 자기 정당화도 이젠 녹초가 된 듯하다. 현 정부 들어 갈수록 거세어지는 경쟁의 강도는 누구든 조금만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은 공격성으로 아이들을 무장하게 했다. 이런 경쟁의 세계에서 타자(他者)의 고통이나 감정은 헤아릴 겨를도 없었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 교수가 저서 『피로사회』에서 갈파한 대로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드러내야 하는 자기과시적 현대사회에서 모두는 경쟁으로 소진됐고, 그래서 피로하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이 치열한 곳일수록 학급당 학생 인원이 타 지역에 비해 월등히 많다 보니 이곳의 아이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피로감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서울 강남 3구, 대구시 수성구, 부산시 해운대구의 학교라고 꼴찌가 없겠나. 남보다 앞서야 하는 성공 방정식만이 통용되는 곳에서 행복한 아이는 소수일 뿐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못나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며 자기를 학대하는 아이들도 눈에 많이 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고 사는 수학 천재 윌에게 상담교수였던 숀은 이런 말을 반복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 말은 자기만의 세상에 닫혀 사회에 대한 공격성을 보였던 윌을 치유해 세상으로 당당히 걸어나가게 했다. 이제 부모 세대가 그 말을 할 차례다. 너와 네가 있는 학교라는 부분의 문제를 확인했으니 경쟁으로 피로한 우리 사회 전체 문제를 그냥 놔두지 않겠다고.

글=강홍준 논설위원
사진=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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