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벌레와 새들에게서 배운다

중앙일보

입력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서 밝게 웃어본 기억이 아득하다. 소방관들의 의로운 죽음이 눈시울을 아리게 하더니 인터넷 게임에 중독된 소년이 동생을 죽였다는 소식에 등골이 서늘해진다.

청년 실업자들의 무리와 이민가려고 짐을 싸는 행렬이 가슴을 답답하게 하더니 모범생 소녀의 원조교제 소식이 손을 떨리게 한다. 계속 뉴스를 보다간 필시 마음 한 구석에 병이라도 얻게 될 듯하다.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혹은 고단한 일상을 피해보려고 TV 앞에 앉았다가 오히려 실의에 젖는 일이 잦지만 가끔은 TV가 잃어버린(내다버린) 자신을 만나게도 해 준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런 프로그램들의 주연은 사람이 아니라 자연이다.

KBS가 공사 창립 특집으로 마련한 환경스페셜(3월 7일 밤 10시 방송) 은 충남 서산 간척지에 얽혀 사는 생물 2백30여종의 삶을 꼼꼼히 포착한 다큐멘터리다. 처음 듣는 이름의 새들이 공중을 비상하는 모습 등이 장관이었다.

족제비.너구리가 야생의 고양이들과 치열하게 먹이 다툼을 벌이는 모습도 흥미로웠다. 비슷한 시각에 EBS는 2부작 자연다큐멘터리 개미의 후반부를 방송했다. 일개미가 생식을 포기하는 이유와 여왕개미가 어떻게 개미왕국에서 절대권력을 갖게 되는지 등도 일단 채널을 고정한 시청자의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자연다큐는 카메라가 스스로 해설한다. 내레이션은 부수적이다. 보면서 자신의 삶에 대입하고 반추하면 (반성하면 더 좋다) 그것으로 족한데 제작진의 친절한 설명이 되레 몰입을 가로막는 경우가 있다. 설명 대신 음악을 효과적으로 삽입하는 편이 나을 때도 있고 자연음이 오히려 산뜻한 긴장감을 불어넣는 일도 흔하다.

시청자는 동물의 세계를 보며 자연스레 감정이입을 한다. 종족보존의 본능과 약육강식의 법칙을 보며 인간이 사는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헤아려 볼 것이다.

그날 밤 뉴스의 끄트머리에 한때 그 서산 간척지의 땅주인이었던 재벌회장 관련 단신이 있었다. 건강이 악화해 가족회의가 열렸다는 소식이었다. 그토록 많은 땅을 가져보았지만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손을 뻗쳐 잡을 수 있는 인간의 온기라는 생각이 들었다(우리나라 대통령은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 '동물의 왕국' 을 즐겨 본다고 자주 말한다.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마침내 그 위치에까지 오른 그가 동물의 세계를 보며 무엇을 느낄까 문득 궁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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