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묘하게 오바마 손 들어준 '사악한 정치 천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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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존 로버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건강보험개혁법안(오바마케어) 합헌 결정의 주인공으로 존 로버츠(사진) 연방대법원장(57)이 뉴스의 중심에 서고 있다. 우선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시절인 2005년 대법원장에 임명돼 ‘부시의 사람’으로 불렸던 그가 오바마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혀를 내두르는 건 그의 절묘한 ‘정치적 판단’이다.

 미 연방대법원은 28일 오바마케어에 대한 위헌소송에서 5 대 4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9명의 대법관이 보수와 진보로 갈려 4 대 4로 팽팽한 상황에서 로버츠 대법원장이 예상을 뒤엎고 합헌 의견을 낸 결과다.

 오바마 대통령은 “국민의 승리”라며 반색했다. 정치·법조계에선 “로버츠 대법원장이 오바마를 구했다”는 평까지 하고 있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WP)와 뉴욕데일리뉴스 등 미 언론들은 로버츠의 결정을 놓고 “사악한 정치 천재”란 색다른 분석을 내놓고 있다. WP는 로버츠가 구한 건 (오바마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공화당과 공화당의 대선후보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라고 보도했다. 판결문이 근거다.

 로버츠는 상법규정을 들어 정부가 국민에게 2014년까지 사기업에 대한 건강보험 가입을 의무화한 건 위헌이라는 의견을 냈다. 다만 결론 부분에서 가입을 안 할 경우 벌금을 부과한 대목에 대해 벌금이 아니라 세금으로 간주할 수 있는 만큼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WP는 이 대목이 대선 국면에서 새로운 불씨가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건강보험 가입 대상자 3200만 명의 경우 가입을 안 하면 세금이 부과된다는 논리기 때문이다.

 롬니는 주지사 시절 오바마케어와 비슷한 건강보험 개혁법을 시행한 일이 있다. 공화당 내에선 위헌 결정이 내려질 경우 롬니가 과연 오바마를 적절하게 공격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있어 왔다. 하지만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리면서도 벌금을 세금으로 규정함에 따라 공화당으로선 증세·감세 논쟁에서 오바마를 비판할 소재가 하나 더 늘었다. WP가 로버츠를 “정치 천재”라고 표현한 이유다. 당장 롬니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취임 첫날 오바마케어를 폐기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오바마와 로버츠는 하버드 로스쿨 선후배 사이다. 하지만 행정부 수반과 사법부 수장으로서 고비 때마다 노선 차이를 보이며 갈등해 왔다. ABC방송은 이번 결정을 두고 로버츠에게 오바마의 ‘프레너미(frenemy)’라는 이름을 붙였다. 친구(friend)와 적(enemy)을 합성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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