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뜻과 인간의 윤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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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인간 복제가 곧 착수된다고 한다. 죽은 아들을 되살리려는 어느 미국인 부부가 6억 원을 투척해서 유전학자, 생화학자, 인공수정 전문가로 이루어진 비밀 조직에 작업을 발주했다는 것이다. 죽은 아기에게서 세포핵을 추출하여 난자에 삽입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성공 확률은 낮다지만 만약 그 작업이 성공한다면,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는 어떤 존재일까? 죽은 아이가 부활한 걸까, 아니면 새로운 생명일까? 과학기술의 개가일까, 아니면 신의 뜻과 인간의 윤리를 거스르는 표상일까?

서구적 인간관, 혹은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에는 사실 모순이 있다. 그 모순은 인간을 신의 피조물로 보면서도 특수한 지위를 지닌 존재로 보는 데서 기인한다. 그리스도교의 신은 인간을 맨먼저 창조한 다음, 그 인간을 위해 세상 만물을 창조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자신이 신의 피조물이면서도 신을 대신해서 지상을 관리하는 이중적인 존재다.

신의 피조물이든 지상의 관리자든 다 좋다. 문제는 인간의 행위가 어느 만큼 신의 뜻을 구현하고 있느냐를 결정하는 기준이 분명치 않다는 거다. 피조물로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원칙적으로 신의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관리자로서 인간의 행위는 때로 같은 피조물인 세상 만물(이를테면 환경)을 해치기도 한다. 숲을 개간해서 아파트를 짓는 행위는 피조물로서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일까, 아니면 관리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일까?

인간이 발전시킨 과학기술에도 분명 신의 뜻이 담겨 있을 터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이용해서 죽은 생명을 되살리는 행위는 신의 뜻에 얼마나 부합하는 걸까? 사실 이런 식의 논쟁은 낯설지 않다. 1859년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출간했을 때 유럽 전역에서는 지금과 비슷한 논란이 더 크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19세기를 다윈의 시대라고도 부를까?

출간 당일 1250부가 팔렸고 발간 후 10년 동안 1만 3000부가 팔려나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베스트셀러였던 '종의 기원'은 알다시피 진화론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진화론이 모태가 되어 유전학이 발달하게 되었으니, 오늘날 생명 복제에 관한 논란도 크게 보면 진화론 논쟁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윈의 시대에는 아직 유전법칙이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변이(變異)가 주요 관심거리였다. 같은 종의 생물이라도 사는 지역에 따라 생김새와 습성이 제각각인 이유는 뭘까? 왜 같은 핀치새인데도 어떤 것은 곤충을 먹기에 적합한 가늘고 긴 부리를 가지고 있고, 어떤 것은 식물의 씨앗을 먹기에 적합한 두꺼운 부리를 가지고 있을까? 물론 지형이나 기후, 먹이 등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외적 조건이 빚어내는 변이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다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를 생존경쟁이라고 본다.

자연 세계에는 제한된 먹이와 제한된 개체수만 생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생존경쟁의 원리가 작용한다. 특정한 종의 생물이 무한대로 증식되지 않는 건 그 때문이다. 이 생존경쟁은 자연선택으로 이어진다. 생존하는 개체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다시 말해 어떤 개체가 생존하기에 적합할까?

그 답은 간단하다. 환경에 잘 적응하는 개체는 생존하고 그렇지 못한 개체는 소멸한다. "빠른 주력과 강한 체력을 가진 늑대는 가장 우세한 생존의 기회를 잡게 될 것이며, 또한 잘 보존되고 선택될 것이다. 가장 많은 꿀을 분비하는 꿀샘을 가진 꽃은 가장 빈번하게 곤충이 찾아들며, 또 빈번하게 교잡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오랜 시간에 걸쳐 우세해지며, 지역적인 변종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자연선택의 원리는 눈에 보이지 않게 조금씩, 그러나 항상적으로 이루어진다.

"자연선택은 날마다, 시간마다, 전세계적으로 지극히 경미한 변이를 계속하고 있으며, 나쁜 것을 버리고 우수한 것을 보존하며,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유기적 또는 무기적으로 '기회가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생활 조건에 대한 모든 생물의 개량을 촉진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경미한 변이라도 오랜 세대에 걸쳐 누적되면 엄청난 변화를 빚을 수 있다. 따라서 개체가 이룬 변이는 조금씩 쌓이고 덧쌓이면서 마침내 다른 생물 종으로의 진화를 이루어낸다. 이렇게 해서 다윈은 진화론을 완성했다.

물론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서는 발표 당시에도 학문적인 논란이 많았다. 우선 개체가 이룬 변이가 어떻게 후손들에게 계속 전달되는지를 알 수 없었다. 더구나 그때까지 발견된 화석들 중에는 진화의 중간 단계를 말해주는 화석의 예가 전혀 없었다.

이에 대해 다윈은 끝내 답을 알지 못했지만 얼마 뒤 멘델과 드 브리스가 그 문제들을 해결했다. 멘델은 유전법칙을 발견하여 변이가 후손들에게 유전되는 메커니즘을 설명했고(사실 멘델은 진화론보다 몇 년 앞서 유전법칙을 발견했으나 다윈이 그것을 몰랐을 뿐이다), 드 브리스는 돌연변이론을 통해 생물의 진화가 다윈의 진화론처럼 완만하게 진행된 게 아니라 주로 급격히 진행된 것임을 밝혔다.

그러나 그런 이론상의 문제점보다 더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생물이 진화한다는 개념 자체다. 이 발상으로 다윈의 진화론은 당시까지 서구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던 그리스도교적 세계관, 즉 모든 생물은 신의 창조물이라는 관념을 여지없이 격파한 것이다. 그 덕분에 <종의 기원>은 근대 과학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지금도 미국의 일부 경건한(?) 주들에서는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진화론이 과연 그리스도교에서 섬기는 신의 뜻을 거스르기만 하는 이론일까? 인간이 근본적으로 신의 피조물이라면 관리자로서 인간의 행위(이를테면 유전자 기술을 통해 생물 종을 변화시키는 행위)도 역시 신의 뜻이 아닐까?

이렇게 본다면 지금 시도되고 있는 인간 복제를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는 관점은 일찍이 진화론에 반대했던 관점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따라서 논쟁의 수준이 진전되려면 이제는 입장을 더 분명히 해야만 한다. 다시 한번 자문해보자. 인간은 신의 피조물인가, 지상의 관리자인가?

그런데, 인간은 신의 뜻을 거스를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존재일까?

남경태 (DIMEOLA@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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