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에 얹혀사는 30대男 마트서 25만원 나오자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결혼 7년차로 맞벌이를 하면서 딸(4) 하나를 둔 연구원 정모(38)씨. 직장생활 10년째로 회사에선 어엿한 중견이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둘째 아이’일 뿐이다. 2남 중 차남인 정씨는 부모와 떨어져 산 적이 별로 없다. 결혼 후에도 서울 목동의 단독주택에서 쭉 같이 살아 왔다.

하지만 그가 부모를 ‘모시거나’, ‘봉양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부모한테 ‘얹혀산다’는 말이 맞다. 부모 소유의 집에 살면서, 생활비도 대부분 부모한테 의존한다. 딸도 어머니(59)가 돌봐준다. 부모 도움 없이는 가족의 생활이 유지되질 않는다. 주말 어머니와 같이 마트에 과일 사러 갔다가 한번에 25만원이 드는 것을 보고 놀랐지만 끝내 지갑을 열진 않았다.

3대가 같이 살면 즐거움도 있지만 갈등도 피할 수 없다. 특히 정씨의 아내(35)는 집안에서 발언권이 거의 없다는 점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휴가계획이나 집수리 등을 혼자 결정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럴 경우 시부모와 장기 냉전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다고 분가를 생각하기도 어렵다. 생활비가 폭증할 게 뻔한 데다 다음달 둘째가 태어날 예정이기 때문이다. 시부모가 외면하면 더 이상 맞벌이를 할 수 없게 된다.

정씨의 경우처럼 결혼 후 부모와 함께 살거나 부모 집 주변에 거주하며 경제적?물질적 지원을 받는 30~40대가 크게 늘고 있다. 나이 먹은 캥거루족들의 증가로 ‘캥거루 대가족’이 속속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픽 참조>부모의 지원 없이는 홀로서기를 할 수 없는 계층이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이로 인해 과거 대가족이나 핵가족 시절 없었던 서글픈 상황들이 빈발하고 있다.

최근 서울시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서울시 거주 30~49세 성인 중 48만5000여 명이 부모가 가구주인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0년 전에 비해 91%나 증가한 수치다. 다른 대도시의 추세도 비슷하다. 집은 따로 있어도 같은 동네에 살면서 육아와 생활 등에서 부모 도움을 받는 경우는 이 통계에 포함돼 있지 않다. 2009년 전국 결혼 및 출산동향조사에 따르면 30~44세 기혼여성의 21.3%가 자녀 양육에 ‘부모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는다’고 응답했다. ‘약간 받는다’는 응답자까지 합하면 약 60%에 달한다. 이를 감안하면 캥거루 대가족 형태로 유지되는 가정의 비율이 상당히 높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독립을 하지 않거나 포기하고 부모의 집에 머무는 30~40대 미혼자도 증가했다. 만혼이 늘고 취직과 내집 마련 등 과거엔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찾아왔던 독립 모멘텀을 잡기가 점점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부모의 울타리 내에서 지내는 캥거루들의 연령대도 높아지고 있다.

반면 1970년대 이후 한국의 가장 보편적인 가족 형태였던 핵가족(3~4인 규모)의 감소추세는 확연하다. 아예 혼자 사는 1인 가구이거나, 조부모 세대를 포함한 캥거루 대가족이 점차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대가족이 해체되고 핵가족화가 일반화 된 7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가족구조가 가장 큰 변화를 겪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30~40대 기혼자들의 부모 의존도가 높아진 가장 큰 이유는 육아와 경제적 문제 때문이다. 노부모 세대는 경제 성장기에 중장년기를 거쳤고, 부동산 투자 등을 통한 부의 축적이 지금보다 수월했다. 경제적 여건이 지금의 30~40대에 비해 여유롭다. 과거엔 부모보다 수입이 많은 자녀가 부모를 부양하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지만 현재의 자녀 세대는 부모 세대보다 돈을 모을 기회가 적다. 이 때문에 ‘연장된 양육’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30~40대로서는 부모와의 동거가 경제적으로 가장 ‘남는 장사’인 셈이다.

하지만 새로운 트렌드인 캥거루 대가족이 확산되면서 문제점도 드러나고 있다. 육아를 위해 6년 전 시댁과 합친 박모(35·여)씨는 “육아 문제 등 부딪히는 측면이 많다”고 말했다. 어린이집에 가기 전 한글 선생님을 불러 공부를 가르치고 싶었지만 “아이가 너무 어리다”는 시어머니의 반대에 그만두었다. 그는 “내 생각과 다르지만, 도움을 받고 있는 처지여서 시어머니 말에 따랐다. 혹시 아이가 뒤처지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분가는 생각하지 않는다. 박씨가 아이 둘을 돌봐줄 입주 도우미를 고용할 경우 월 150만~200만원을 지출해야 한다. 부부 중 한 사람의 월급은 고스란히 양육비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박씨는 “친구들 사이에선 ‘불편하더라도 어쨌든 시부모의 도움이 최선의 선택이다. 아이가 커갈수록 비빌 언덕이 없으면 맞벌이는 포기해야 한다’고 말들을 한다” 고 전했다.

어른들도 불만이 많다. 일단 육체적 부담이 크다. 딸 다섯을 둔 오모(70·여)씨는 지난 10년 동안 외손자?외손녀 육아로 숨돌릴 틈이 없었다. 현재 그는 임신 6개월 상태에서 직장에 다니는 넷째 딸의 아들(9)을 돌봐주고 있다. 오씨는 넷째 딸이 출산하게 될 걸 생각하면 겁부터 난다. “사돈도 그 집 외손자를 봐주다 디스크가 도져 움직일 수 없는 처지라 서운한 말을 할 상황도 아니다”라고 한숨 지었다.

손자녀 양육으로 부모의 노후 자금을 잠식하거나, 노후 준비에 차질이 생기기도 한다. 오씨도 “부업을 하면 월 100만원을 벌어 내 생활에 보탤 수 있는데 못하고 있어 손해를 보고 있다”며 “내가 모른 척하면 집안에 풍파가 일 것 같아 참고 산다”고 불평했다.

생활비와 가사 분담 등을 놓고 갈등을 겪는 가정도 많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접수된 합가 가정의 상담 사례를 살펴보면, 고민 1순위는 금전문제다. 최근 이곳을 찾은 A씨 (30·여)도 경제력이 없는 남편과 함께 시댁에 살면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례다. 그는 “남편이 직장이 없어 생활비를 시부모에게 타 쓰는데, 난 그냥 가정부처럼 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편은 “나중에 유산을 받으면 되는데 뭐가 걱정이냐”고 되물을 정도로 상황 개선의 의지가 없다. 조은경 상담위원은 “경제적으로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부모와 갈등을 겪으면 출구전략이 없어 더욱 고통을 느끼는 것 같다”며 “캥거루족의 상담은 고부갈등, 장서(사위-장모)갈등, 경제갈등 등 각종 갈등의 종합선물세트 같을 때가 많다”고 말했다.

합가 가족이 늘면서 각종 인터넷 육아 커뮤니티는 시부모 혹은 장인?장모 성토의 장이 되기도 한다. 한 유명 육아사이트엔 최근 “은행 대출 1억원을 빨리 갚기 위해 친정으로 들어왔는데 남편과 어머니가 육아 문제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고민 글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회원은 “남편이 아기에게 감을 먹이다 감씨가 목에 걸렸는데 이를 빼내다 피가 나서 엄마와 싸웠다”며 “엄마는 사위의 생각 없음을, 사위는 장모가 ‘야, 너’로 부른 것을 서운해 하고 있어 중간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적었다.

40세를 넘겨서도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노부모 곁에 더불어 사는 ‘고령 캥거루족’도 흔해졌다. 서울 서초동에서 학원을 운영하는 은모(41·여)씨는 태어나서 한 번도 부모 곁을 떠난 적이 없다. 은씨는 “학원 운영을 위해 진 빚을 갚고 은퇴 자금도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독립은 생각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물론 불편함은 있다. 은씨는 “집안 청소 문제로 다투다 엄마한테 ‘나가라’는 말을 들어서 상처를 받았다”고 말했다.

뚜렷한 직업 없이 부모의 노후자금을 잠식하다 분쟁을 겪는 캥거루도 눈에 띈다. B씨(65)는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고 담뱃값까지 타가는 아들(35)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하다. 최근 아들이 “어차피 유산을 물려줄 것이면 지금 달라”고 떼를 쓰는 바람에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버지 B씨는 “1000만원짜리 전세를 구해줄 테니 일자리를 구해 생활비는 알아서 쓰라”고 말했다. 이에 아들은 ?아버지가 어렸을 때 날 학대해 정신적인 충격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렵다?고 맞섰다.

송다영 인천대(사회복지학) 교수는 “서구의 부모와 자녀 관계는 정서적 지원을 매개로 하는 반면, 한국은 경제적 지원이 매개인 경우가 많아 갈등이 생기면 심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심한 경우 노인 학대와 마찬가지로 자녀 학대 등도 예상할 수 있다”고 했다.

김혜영 숙명여대 정책대학원 교수는 “사전에 합가의 형태, 기간, 생활비 분담 등을 자녀와 부모가 합의해 두는 게 좋다”며 “막연한 마음으로 ‘잘되겠지’ 생각하다 어느 한쪽이라도 손해보는 느낌을 받으면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전영선 기자 azul@joongang.co.kr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