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프는 책상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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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늙은 남자에 관한 이야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남자. 미소를 짓거나 화를 내기에도 너무 지친 남자. 방 안에 자폐적으로 고립된 남자. 기껏 산책하거나 책상과 방문을 왕래할 뿐인 비루하고 초췌한 남자. 회색 노인에 관한 이야기다.

영원히 변치 않을 것만 같은 일상의 주인공이던 그가 돌연 분노했다. 세상이 달라져야만 한다고 미친 사람처럼 외쳤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말인가. 그는 다시 외쳤다. "나는 언제나 책상을 책상이라 말하고, 그림을 그림이라 말하고, 침대는 침대라고 부르고, 의자는 의자라고 부른다. 도대체 왜 그렇게 불러야 한단 말인가?" 그는 언어와, 그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과의 관계에 회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싸르트르의 '구토'가 연상되지 않는가.

아무튼 그는 이제 비로소 세상과 대면했고 개안했다. 무엇 때문에 침대를 사진이라고 부르면 안된다는 것인가, '침대' 혹은 '사진'이란 용어는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을 완벽하게 규정하는가. 그는 언어의 자의성과 그것의 사회적 공인에 대해 심각하게 갈등했다. 언어의 구속에서 탈피하기 위해 그는 의도적으로 사물의 명칭을 뒤섞었다. 이를테면 '사과'를 '신문'으로, '침대'를 '과자' 등으로 뒤죽박죽 혼효시켰다.

다른 용어를 사물의 명칭으로 삼았고, 자기만의 언어로 꿈을 꾸었다. 그는 행복했다. 그러나 바뀐 용어를 거듭 암기해야 했고, 점차 과거의 언어는 잊었다. 새로운 단어도 노력하지 않으면 잊혀졌다. 더구나 큰 문제는 타인과의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타인과 사용하는 언어가 달랐으니 당연했다. 그는 침묵했다. 그는 자기하고만 이야기했고 거듭 침묵했다. 그는 '책상은 책상이다'라고 조용히 읊조렸다.

페테 빅셀의 한 슬픈 우화다. 이 우화의 내용은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연상시킨다. 마그리트는 파이프를 그리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파이프가 아닌 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이것'이 지시하는 언어와 그것을 판단하는 메타언어와의 거리는 이것을 확인시킨다. 당연히 '파이프를 그린 그림'은 파이프가 아니다. 그것은 그림에 불과하다. 사물은 화면에 묘사된 실재가 결코 아니다. 이미지일 뿐이다.

그의 그림에서 달걀은 구두는 모자는 촛불은 유리컵은 망치는 돌이 되고 돌은 나무가 된다. 나무는 사람일 수도 있고 악어일 수도 있다. 이처럼 언어는 현실을 오히려 비결정론적인 것으로 형성한다. 마그리뜨는 "사물은 이름을 갖고 있지만 우리가 그보다 더 적합한 이름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언어는 아주 우연적으로 사물과 결합할 뿐이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였다. 사물의 본질은 은폐된 진실을 밝힐 때 드러난다. 감추어진 사물의 참모습을 밝히는 활동은 또 언어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 중에서도 시어를 통해서 인간은 존재에 다가갈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이는 헤겔 식의 지나치게 낙관적인 동일성은 아닌가.

마그리뜨는 이것을 회의한 것이다. 그는 화폭에 풍경을 그렸다. '인간의 조건'이란 그림. 그 캔버스는 창 밖의 정경과 그대로 일치한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캔버스는 창이기도 하고 창 밖의 광경을 그대로 재현한 훌륭한 그림이기도 하다. 그러나 창이 산산조각 나고 창 밖이 캔버스의 풍경과 다른 광경으로 밝혀졌을 때, 우리는 당혹한다. 어느 것이 실제이고 실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그는 묻는다. 이 물음에 해답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가식적인 행복에 매몰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그리뜨는 제발 언어가 재현하는 혹은 회화가 재현하는 현실을 믿지 말라고 끊임없이 우리를 자극한다. 사물에 대한 언어적 회의. 그래서 그는 다분히 철학적이다. 그가 언어와 사물과의 관계를 통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강조했을 때, 그는 이미지와 대상 사이의 모호한 관계와 그것의 의미를 성찰케 한 것이다. 과연 세계는 이해 불가능하며 재현될 수 없는가?

문학사의 이단아 이상. 그는,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는 다시 절망을 낳는다"고 하였다. 이상의 시대는 절망적이었다. 절망의 시기. 그는 언어가 시대를 반영하거나 혹은 현실을 지시하는데 무리가 있다는 것을 처절하게 인식했다. 언어로 현실을 파악해야 하는 시인에게 그것은 자살과 같다. 마그리뜨가 순수하게 언어와 사물과의 관계를 문제삼았다면, 이상은 언어와 사물과의 관계를 비합리적으로 왜곡시키는 혹은 의미의 전달을 방해하는 시대적 횡포를 문제삼은 것이다.

그것은 대상을 지시하는 언어의 기능을 불신한 행위였다. 언어는 세계를 지시하지 않는다. 언어의 불신은 철저하게 의사소통의 부재를 초래했다. 그러나 묘한 것은 언어에 대한 회의가 강하면 강할수록 역으로 그 언어는 엄혹한 시대의 심장부를 겨냥한다는 것이다. 이상은 언어의 불신을 통해 언어와 현실과의 긴밀한 관계를 역설적으로 강조한 셈이다.

마그리트 역시 유사하게 언어는 사물과 긴밀한 연관을 갖지 않으므로 사물을 정의할 다른 이름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언어의 기능은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에 너무도 미약하다. 그가 대상의 이름을 우연적으로 결합시키거나 이질적인 사물과 사물을 돌발적으로 결합하는 것은 사물과 언어의 관계를 회화적으로 문제 삼은 것이다. 이처럼 그는 회화를 통해 사물과 언어와의 관계를 새롭게 통찰하고 상투화된 현실로부터 탈피하기를 희망했다.

작품이 현실을 재현할 수 있을까, 혹은 언어가 사물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작가는 자신이 체험하고 경험한 현실을 얼마나 제대로, 혹은 진실(?)하게 반영할 수 있을까. 예술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사물의 의미를 재현할 수 있을까.

마그리뜨는, 사물의 명칭을 새롭게 부여하거나 친숙한 대상들의 일상적인 관계의 질서를 전도시킬 때 가능하다고 답한다.


조용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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