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가짜 이름을 버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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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고,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일을 이루지 못하며… 백성이 손발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이다(『논어』 자로(子路)편). 이름은 단지 사물을 지시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사물의 실체를 드러내는 수행적(performative) 기능을 지닌다. 서양철학이 20세기에야 비로소 눈을 뜬 '언어의 수행적 기능'을 공자는 이미 2500년 전에 정명론으로 설파한 것이다.

민족은 원래 우파의 가치다. 민족주의가 극단으로 흐르면 나치즘이나 일본의 극우파처럼 배타적 국수(國粹)주의로 치닫는다. 그에 반해 좌파는 민족의 울타리를 넘어 세계와 인류를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소외계층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분배 정의의 실현, 평등과 평화, 생태환경의 보호를 위해 헌신한다. 이것이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진보의 아름다운 길이다.

진보의 이름으로 이 길을 거꾸로 가는 무리가 있다. '이름이 바르지 않은 것'이다. 자유?민주?인권?반핵(反核) 등 진보의 핵심가치를 내던지고, 민족의 이념 아래 오직 북한의 주체사상을 맹종하는 광신도들이다. 우리의 해군기지를 해적기지라고 모독하면서 북한의 핵무기는 자위용(自衛用)이라고 감싼다. 65년에 이르는 3대세습의 선군(先軍)독재도 "죄악시하면 안 된다"고 두둔한다. 유신정권과 신군부의 15년 군사독재를 만악(萬惡)의 뿌리처럼 비난하는 그들이…. '말이 순조롭지 않은 것'이다. 진보는커녕, 지독한 수구(守舊)요 시대착오적인 퇴보다.

그러나 저들의 진짜 이념은 민족이 아니다. 북한동포의 처절한 삶, 암울한 인권을 외면한 채 민족주의를 외칠 수는 없다. 북쪽의 현재진행형 독재에는 그처럼 관대하면서 남쪽의 과거 독재에는 아직껏 이를 가는 까닭이 무엇인가. 논란의 중심에 있는 당사자가 스스로 답을 내놓았다. "종북(從北)보다 종미(從美)가 더 문제다."

그렇다. 종북의 속살은 민족이 아니라 반미(反美)다. 6?25 남침을 막은 '철천지 원쑤' 미국이 미운 것이고, 그 미국을 동맹국으로 둔 대한민국이 싫은 것이다. 반면에 항미원조(抗美援朝)로 북한의 종주국이 된 중국에는 턱없이 너그럽다. 한·미FTA는 극력 반대하면서 한·중FTA에는 무덤덤하다. 넘쳐나는 중국산 불량식품에는 관심조차 없지만, 미국산 쇠고기에는 기를 쓰고 촛불을 치켜든다. 종북 이야기만 나오면 색깔론?마녀사냥?매카시즘을 들먹이며 펄쩍 뛰곤 하지만, 사상에 거리낌이 없다면 그처럼 과민반응 할 이유가 없다.

입만 열면 도덕성을 부르짖던 사람들이 대리투표?무더기투표?공개투표 등 온갖 불법을 저지른 혐의가 드러나자 도리어 폭력을 휘두르면서 진보정당을 최악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따위 막가파식 진보는 세상에 없다. 저들은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다. 태극기 앞에서의 국민의례도 거부한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이 거부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국회에 들어가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공자의 우려처럼 '국민의 손발을 묶으려는 것'이 아니라면.

역사의 섭리는 오묘하다. 뜻밖에도, 저들에게 '종북'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저들과 진보의 이름을 공유해온 동지들이다. 의사당에 최루탄을 터뜨린 손길을 공중부양의 발길이 심판하는 모양새다.

그네들만의 일이 아니다. 평양에 건너가 '어버이 수령'과 포옹했던 제1야당의 초선의원은 자유를 찾아 탈북한 동포에게 변절자 운운하면서 북한인권운동을 '이상한 짓'이라고 빈정거렸다. 같은 당 대표로 선출된 사람은 얼마 전 "북한 인권문제의 제기는 내정간섭"이라고 호령했다. 국경?체제?이념을 초월하는 자유와 인권의 보편적 가치도 북한이라는 성역(?) 앞에서는 일체 금기(禁忌)가 되고 만다.

우파는 극우파가 망치고, 좌파는 극좌파 때문에 망한다. 극우는 가짜 보수, 극좌는 짝퉁 진보인 셈이다. 주체사상을 동경한 나머지 북한에 들어가 그 '정명 없는 실체'를 몸소 확인한 강철서신의 김영환 씨는 북한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다가 중국에 감금돼있다. 국회의원 배지에 목을 맨 짝퉁 진보들에 비하면 그의 '이상한 짓'이야말로 얼마나 치열하고 숙연한 진보의 삶인가.

"모난 데가 없는데 어찌 '모난 술잔(?)'이라 할 수 있는가." 거짓 이름을 꾸짖는 정명론의 질책이다(『논어』 옹야(雍也)편). 진보의 가치가 없으면 진보정당이 아니다. 동족의 인권을 무시하는 민주정당은 없다. 짝퉁 민주, 가짜 진보는 그 거짓 이름을 버리든가, 미망(迷妄)에서 돌이켜 바른 이름을 찾든가, 정직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언제까지 가짜 이름으로 역사와 국민을 속이려는가.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