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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다시읽기] 윌리엄 깁슨 '뉴로맨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가상공간의 창세기 『뉴로맨서』.

1985년 유학시절 어느 겨울날 뉴욕의 한 서점에서 이 책을 처음 접했다. 84년에 초판이 나오고 1년이 좀 지난 때였다. 그후 순식간에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바로 그 책이 어느새 공상과학소설(SF)광.영화광.문화평론가뿐만 아니라 컴퓨터 과학자.공학자.해커들이 "사이버스 페이스(가상공간)의 효시적 작품" 이라 경배하는 '고전' 이 돼 버렸다.

그러나 그 당시 나의 뇌에는 '미세생체공학' 등의 전문용어는 물론, '매트릭스의 세계가 빚어내는 합의적 환영… 비옥한 데이터의 들판' (5쪽)과 같은 요상한 문장을 담을 디스크가 아직 포맷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난해한 용어들과 씨름하다가 책을 덮고 말았다. 4년 뒤 재도전했을 때 비로소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인지과학 수업을 듣고, 3차원 그래픽 모델링 프로그램이 장착된 매킨토시IIx 컴퓨터를 집에서 사용하고, 뉴욕 이스트 빌리지 뒷골목과 펑크족의 음침한 문화가 제법 친근하게 다가올 무렵이었다.

오늘날 이 책을 읽는 데 상당한 시간과 내공이 소모된다는 말은 이제 먼 옛날의 전설이 되었다.

게임방 PC에서 스타크와 리니지에 물려 있는 젊은이들과 전세계 웹사이트를 돌며 파도타기하는 이들에게는 아주 쉽게 구체적인 현실로 읽혀진다.

이쯤에서 사이버 스페이스가 무엇인지 저자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모든 국가, 수십억의 조작자들에 의해 매일같이 합의를 통해 성립된 환영… 추상화된 데이터의 그래픽 재현… 생각할 수 없는 복잡성… 데이터의 군집과 성운… 빛나는 도시처럼' (51쪽). 그는 확실히 선지자였다.

아직 세상은 소설 속 배경인 치바처럼 마약.섹스.무기상이 판치는 사이버 펑크의 암흑도시로 변하진 않았다.

하지만 테헤란 밸리 벤처인들은 주인공 케이스처럼 '사이버 스페이스의 꿈을 꾼다' (4쪽). 해커들은 이 '빛나는 도시' 에 침입해 정보 도둑질은 물론 바이러스를 유포하고, 누군가는 '벽같은 방어시스템' 을 구축해주고, '사이버 슈바이처' 안철수는 백신을 조제해 치료해준다.

『뉴로맨서』를 흔한 SF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좀더 좋은 뇌를 이식받아야만 한다.

겉 무늬는 미래도시에서 케이스와 여자 경호원 몰리가 함께 인공지능을 추적하는 SF 활극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속살은 첨단공학.디자인.문화인류학.문학 등의 수많은 영역에서 중요한 의미를 발하고 있음을 간과하면 안된다.

깁슨은 기존 SF류와 달리 가상공간 내에서 다뤄지는 인공지능과 정보의 형태를 시각 이미지로 표현해 냈다.

이는 89년 인류 역사상 최초로 가상공간 속에서 실제로 돌아다녔던 제론 레이니어의 가상현실(VR) 기술과 디자인의 예고요 영화 '론머맨' (92년), '코드명 J' (95년), '매트릭스' (99년)의 원형이기도 했다.

또한 깁슨이 언급했던 인공보철술.신경접합.신경외과의학 등의 첨단 의술들은 사이보그 인류학이라는 주제로 '탈현대 신체성' 의 논쟁거리를 제공한다.

예컨대 85년에 다나 해러웨이가 발표한 '사이보그를 위한 선언문' 이 바로 그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이 반기듯이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이 더 이상 운명을 좌우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뉴로맨서』를 필두로 『카운트 제로』(86년),『모나리자 오버드라이브』(88년)로 이어진 깁슨의 3부작은 80년대 '사이버 펑크' 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를 열어놓았다.

원래 '펑크' 란 말은 다국적 인간들이 지배하는 세계도시의 암흑가와 그 속에 거주하는 인간들을 뜻한다.

깁슨은 궁극적으로 근미래의 인간과 정보생태계가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적임을 예고하려 했던 것이다.

부디 자신이 만든 괴물에게 죽은 소설 『프랑켄슈타인』(1818년)의 비극만은 없기를 바라며.

김민수/전 서울대 교수,디자인문화비평 편집인
(getto@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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