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스타 교실 열어 우울증 날리고 … 텃밭 만들어 이웃과 친목 다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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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부가 핸드드립 커피를 만들고 있다.

6864세대 규모의 대단지 아파트. 이 곳에 사는 주부들은 바쁘지만 즐거운 24시간을 보낸다. 커피 수업을 듣고 가족들이 먹을 채소도 자신이 직접 키운다. 모임을 만들어 기부 활동에도 참여한다. 삭막할 수도 있었던 단지가 주부들이 활발히 교류하면서 달라졌다.

지난달 24일 11시 강의장은 시끌벅적했다. 대여섯 명씩 조를 나눠 테이블을 차지한 참가자들이 막 내린 핸드드립 커피를 마셔보고 있었다. 다른 이가 내린 커피를 맛보며 자신이 만든 커피와 어떻게 맛이 다른지 비교해 보기도 했다. 자연스레 대화가 오가는 중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각자 잔에 든 커피를 다 마시자 핸드드립이 이어졌다. 한 참가자가 드립포트(주둥이가 좁은 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담았다. 로스팅한 원두를 그라인더에 간 후 깔때기 모양의 거름 장치인 드립퍼에 담고 물을 부었다. 드립서버에 흑갈색 커피가 서서히 채워졌다. “누가 어떻게 물을 따르느냐에 따라 커피 맛이 달라져요.” 물을 따르던 주부가 말했다.

송파구 신천동 파크리오 아파트 관리동 2층에 있는 대표회의실 풍경이다. 이 날 아파트 주민들은 ‘바리스타 10주 완성 심화 과정’ 네 번째 수업을 듣고 있었다. 참가자 이선형(36)씨는 “주민들끼리 취미생활을 즐기고 친분도 쌓을 수 있는 데다 참가비도 7만원으로 저렴해 좋다”고 말했다. 방과후 학교 교사인 김현진(35)씨는 “평소 커피에 관심이 많았는데 아파트 단지 내에서 수업을 연다고 해 참가했다”며 “다섯 살인 아이가 좀 더 크면 조그만 카페를 차릴 생각”이라고 전했다. 이 수업이 다른 일에 도전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된 셈이다.

최영하(41) 강사는 “10주 동안 커피의 유래, 로스팅, 핸드드립 등을 가르친다”며 “우울증을 겪는 주부가 늘어나고 있다는데, 이웃간에 교류가 없는 아파트 구조가 이러한 문제를 더욱 키운 게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그는 “수업 내내 즐거워하는 주부들을 보면 강사로서 힘이 나고 보람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수업이 시작된 것은 지난 달 초.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진행된다. 기초 교양 과정은 오후 1시부터 3시까지다. 아파트 부녀회에서 두 달여 동안 준비해 개최했다. 젊은 주부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이경애(54) 부녀회장은 “주부들이 아이들을 돌보고 남는 시간에 할 수 있는 적당한 활동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바리스타 수업을 열었다”고 말했다.

아파트 관리동 옥상에 만든 텃밭에서 채소를 가꾸고 있는 주민들

바리스타 수업이 열리고 있는 관리동 2층을 지나 위로 올라가면 ‘옥상 텃밭’이 있다. 플라스틱 상자가 여러 줄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안에 상추, 배추, 파 같은 채소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이곳에서도 주부들의 손이 분주히 움직인다. 올해 초 아파트 관리센터에서 텃밭 이용 신청을 받았다. 지난해 7월 송파구청 지원으로 처음 생겨 신청을 받은 후 두 번째다. 아파트 한 세대가 상자 두 개에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신청자가 제한 인원 100명을 넘어서 현재까지 대기인원만 50여 명에 이른다.

이명자(70)씨는 “텃밭에 가면 내 채소에만 물을 주지 않는다. 이웃 상자도 챙긴다”며 “각자가 키운 채소를 나눠 먹기도 하고 서로의 집을 방문할 때 키운 채소를 가져가 고기를 구워 먹으며 친목을 다지기도 한다”고 전했다.

외출하기 전 잠시 텃밭을 찾았다는 정문자(50)씨는 “단지 내에서 이웃들을 만나면 그냥 스치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텃밭에선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게 된다”며 “많은 양이 든 씨앗 봉지를 함께 구입한 후 나눠 심고, 서로 정보를 주고 받으며 몰랐던 농사 비법도 배운다”고 말했다.

임숙자(65)씨는 “주민들과 가까워질 뿐만 아니라 채소값도 아낄 수 있고 직접 키운 농작물로 무공해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좋다”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아파트 내에는 기부활동을 하는 주부 커뮤니티 ‘파크리오맘’이 있다. 2008년에 만들어진 이 모임은 각종 모금 활동을 통해 2010년부터 아프리카에 식수를 공급할 수 있는 우물을 만들어 주고 있다. 지난 4월 아파트 근처 공원에서 ‘나눔 벼룩시장’을 열었는데 행사 수익금은 전액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 인근 초등학교에 후원된다. 파크리오맘이 기부하는 네번째 우물이 세워질 예정이다. 지금까지 탄자니아에 2정, 모잠비크에 1정을 기증한 바 있다. 이외에도 지역아동센터 2곳과 장애복지시설을 꾸준히 돕고 있으며 결식 아동 지원, 긴급구호 활동도 한다.

파크리오맘 운영자인 임유화(36)씨는 “우리 단체는 어머니들로 구성돼 있다. 엄마의 입장에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그냥 볼 수 없다는 데 동의해 기부 활동을 펼치고 있다”며 “금전적인 지원뿐 아니라 책, 옷 같은 회원 물품을 모아, 이를 필요로 하는 아동센터나 복지시설에 보내는 일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글=조한대 기자
사진=장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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