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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금성이 태양을 지나간다 다음은 105년 뒤다 마음이 겸손해지지 않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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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고교 국어교과서에서 처음 만난 이양하의 수필 ‘신록예찬(新綠禮讚)’. 요즘 새로 읽어도 세상과 자연을 보는 지은이의 맑고 단아한 눈길이 느껴진다. 가령 이런 대목이다. ‘우리 사람이란- 세속에 얽매여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주머니의 돈을 세고 지위를 생각하고 명예를 생각하는 데 여념이 없거나, 또는 오욕칠정(五慾七情)에 사로잡혀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는 데 마음에 영일(寧日)을 가지지 못하는 우리 사람이란, 어떻게 비소(卑小)하고 어떻게 저속한 것인지, 결국은 이 대자연의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조화를 깨뜨리는 한 오점 또는 한 잡음밖에 되어 보이지 아니하여…’.

 요즘 같은 초록의 계절이 찾아오면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라는 구절이 특히 다가온다. 그만큼 내가 세속에 찌들어 ‘오점’과 ‘잡음’의 삶을 산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래도 시공을 넘나드는 구원(久遠)의 세계에 대한 동경까지 저버리기는 싫은가 보다. 사이비 짝퉁으로라도 가끔 흉내 내고 싶은 것이다. 몇 년 전 한 바자회에서 중고 천체망원경 세트를 선뜻 사들인 것도 아마 머리 위 푸른 하늘에 미안해서였다. 원체 이 분야에 문외한인 데다 구입한 러시아제 망원경이 알고 보니 부품 몇 개가 빠진 것이어서 겨우 달 표면 한 번 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천체관측 서적들을 읽는 등 한동안 나를 들뜨게 만들었던 망원경은 도로 박스에 담겨 서재 구석에 처박혔다. 그래도 안드로메다 운하와 말머리 성운, 게자리 성운을 내 눈으로 보고 싶은 꿈은 아직 접지 않았다.

 내일 아침 7시9분부터 오후 1시49분까지 금성일식, 정확히는 ‘금성 태양면 통과(Venus Transit of Sun)’ 현상이 펼쳐진다. 지구·금성·태양이 일직선에 놓이기 때문이다. 금성이 벌이는 우주 쇼는 망원경 발명 후 400년 동안 7번 관측됐다. 2004년 6월 같은 현상이 있었지만 한반도는 날씨가 좋지 않아 극히 일부 사람만 보았다. 그 이전은 1874년 12월, 1882년 12월 두 차례 금성일식이 벌어졌다. 한국천문연구원에 따르면 조상들이 남긴 관측 기록은 없다. 1882년은 저녁 시간에 일식이 생겨 관측 자체가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날씨가 괜찮다는 내일의 우주 쇼는 우리나라에 1874년 이후 138년 만에 찾아온 기회로 봐도 된다. 이번에 놓치면? 2117년 12월까지 105년을 기다려야 한다. 엄청 장수할 몇몇 갓난아기 빼고는 기회가 오지 않겠지만.

 태양·금성·지구가 엇갈리든 일직선이든 뭐가 대수란 말인가. 하지만 생각해보라. 우리 수명을 훌쩍 넘어서는 우주 법칙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겸손해지고 여유가 생기는 것 같지 않은가.

글=노재현 기자
사진=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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