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영아 여론 女論

너, 종북 세력이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대학 교수

박완서의 소설 ‘돌아온 땅’(1977) 후반부에 취객이 시외버스에 올라타 행패를 부리는 에피소드가 들어있다. 그는 한 젊은 여성의 옆자리에 앉아 고성방가를 하더니 이번에는 그녀에게 시비를 걸며 노래를 부르라고 윽박지른다. 그의 주정을 보다 못한 승객들과 차장이 마침 지나던 검문소에 버스를 세우고 헌병에게 그를 끌어내려 달라고 호소했다.

 그런데 헌병이 버스에 올라타자 그는 갑자기 주정을 딱 그치고 멀쩡한 척을 해서 헌병을 돌려보낸다. 헌병이 내리고 버스가 다시 출발하자 그는 벌떡 일어나 “야, 이 빨갱이 놈의 새끼야”라고 고함친다. 그리고 살기등등한 눈으로 승객들을 노려보며, 자신을 끌어내라고 한 놈은 빨갱이 아니면 공산당일 거라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취한의 충격적인 발언’ 이후 승객들의 반응이다. 승객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취한의 ‘너도 빨갱이지?’ 하는 지적이 자신에게 떨어질까 봐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갑자기 ‘승객이 죄인이 되고 취한은 죄인을 응징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결국 아무도 그 취객 옆의 여성을 도와줄 수 없게 되자 그녀는 그가 시키는 대로 노래까지 불러야 했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박완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취한은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치를 떨며 미워하는 빨갱이라는, 악 중에도 최악을 내세워, 자기가 저지른 악을 최소한으로 축소하고 마침내 무화(無化)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악이란 악은 빨갱이라는 강렬한 최악만 만나면--그게 설사 허상이더라도--맥을 못 추고 위축되는 이 땅 특이한 풍토를 이 취한은 취중에도 교묘히 이용한 것이다.”

 박완서 소설의 ‘빨갱이’라는 말의 자리를 오늘날에는 ‘종북(從北)’이라는 말이 대신하고 있다. 최근 TV방송의 시사토론 프로그램에서 한 패널이 ‘김정일에게 욕설을 할 수 없으면 종북 세력’이라는 말을 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그 며칠 전 또 다른 시사토론 프로그램에서도 한 시민논객이 패널에게 종북주의에 대해 질문했다.

 이 해묵은 ‘사상검증’의 논리가 지상파에서 불거지게 된 데에는 최근의 통합진보당 내 일부 세력들이 자기들 조직과 권력을 수성하기 위해 벌이고 있는 추태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그들과 다른 진보세력이 완전히 분리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구별을 명분으로 “너 종북주의자지?”라는 질문을 대놓고 하는 사람이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

 박완서 소설의 취객이 그랬듯, 빨갱이(종북)라는 말은 한국 사회의 원형적 공포와 분노를 자극해서 사태의 본질에 대한 냉정한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