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돈의 뉴욕이야기] 할렘이 흥청거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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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렘은 전 세계에서 가장 악명높은 장소 중 하나다.

뉴욕 렉싱턴 애비뉴(남북방향)와 96번가(동서방향)가 할렘으로 진입하는 경계 도로인데 이 곳을 넘어서면 온통 흑인들밖에 눈에 안띈다.

강도.강간.폭력.마약 등 온갖 범죄가 난무하는 곳, 백인들이 멀쩡한 빌딩을 내버리고 떠나버린 곳이 할렘이다.

개척 초기 네덜란드 이주자들이 축복의 땅이란 뜻으로 '할렘' 이라고 이름 지은 곳이 저주의 땅으로 둔갑한 것이다.

이 할렘에 르네상스의 바람이 불어닥치고 있다. 사상 최대의 경제 호황에 힘 입어 자본이 대거 유입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스트 할렘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스트 116번가에서 크로스 타운 버스에 몸을 싣고 웨스트 할렘의 컬럼비아대로 등교하는 백인 학생, 6번 지하철을 타고 뉴욕대학 등으로 등교하는 아시안 학생들의 물결로 할렘은 더 이상 흑인들만의 장소라는 말이 무색하다.

뉴욕대학 영화 전공 학생들은 할렘이 '저렴한 생활비' 외에 '생생한 소재를 찾을 수 있는 곳' 이라며 무작정 할렘에 방을 얻는다.

증시 호황으로 '주니어 백만장자 생활' 을 즐기던 증시 분석가들은 증시가 침체하자 싼 임대료를 찾아 '할렘행' 을 결행하고 있다.

특히 할렘은 최근 뉴욕의 마지막 부동산 투자장소로 변했다.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는 "맨해튼에서 투자할 수 있는 곳은 할렘밖에 없다" 고 거침없이 말한다.

할렘 재개발 붐이 일면서 최근 대형 슈퍼마켓 패스 마크와 건축자재 종합 백화점 홈 디포 등이 속속 들어서고 스타벅스 커피점이 오픈했다. 미국 어디에나 있지만 할렘에는 없었던 상점들이 되돌아 온 것이다.

하지만 부동산 업자들이 관심을 보이는 건 할렘에 수두룩하게 버려진 건물들의 리노베이션(개조)이다. 싼 가격으로 이런 건물들을 구입해 조금만 손보면 소규모 아파트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건물들은 세금 체납으로 소유권이 시 당국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20만~30만달러면 공매로 구입이 가능하다. 수리비용까지 합쳐 약 40만~50만달러에 3층 규모에다 방 6개짜리 아파트를 소유할 수 있다.

그 경우 건물 소유주는 월 평균 임대수입으로만 7천~8천달러를 올린다. 아주 짭짤한 투자인 셈이다. 세입자 입장에서도 맨해튼 다운타운의 원 베드룸이 평균 월 4천달러지만 할렘에선 월 1천3백달러면 되기 때문에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

맨해튼이 완전 포화상태가 되자 이제 백인들.아시아계가 할렘으로 밀려가고 있다. '흑인거주지 할렘' 이 사라질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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