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태도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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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호 32면

“여느 때처럼 아침 다섯 시가 되자 기상을 알리는 신호소리가 들려온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One Day in the Life of Ivan Denisovich)는 이렇게 시작된다. 바깥 기온이 영하 30도까지 내려간 1월의 어느 날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일상 풍경이 작품 줄거리다. 아무 죄도 없이 억울하게 수용소에 갇힌 주인공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는 오늘도 추위와 굶주림, 분노와 두려움으로 가득한 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그에게서 절망이나 비굴함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누구보다 긍정적이고 진지하며 유머감각까지 있다. 나이 사십에 수용소 경력 8년차의 죄수답지 않게 귀여운 인상마저 풍긴다.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13>『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벽돌 쌓는 작업을 하면서는 땀까지 흘릴 정도로 열심이다. 작업 끝 신호가 울리자 다들 하던 일을 팽개치고 달려나가지만 슈호프는 일손을 멈추지 않는다. 모르타르가 남았고, 그의 지랄 같은 성미는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농담까지 던진다. “이렇게 하루가 짧아서야 무슨 일을 하겠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하루가 다 갔으니 말이야!”

심지어 마지막 순간에는 매우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점심 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대신 줄을 서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날이었다.”

이 작품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을 꼽자면 저녁 식사로 멀건 양배춧국을 먹는 장면이다. 슈호프는 경건한 자세로 모자를 벗어 무릎 위에 얹는다. 그리고 국그릇에 담긴 건더기를 숟가락으로 한번 휘저어 확인하고는 국물을 쭉 들이킨다.
“따끈한 국물이 목을 타고 배 속으로 들어가자 오장육부가 요동을 치며 반긴다.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바로 이 한순간을 위해서 죄수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모든 불평불만을 잊어버린다. 그래, 한번 견뎌보자. 하느님이 언젠가는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테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1962년에 발표한 이 소설에는 작가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포병장교로 복무하다 반역죄로 체포돼 11년간이나 감옥과 수용소, 유형지를 돌아다녀야 했던 그의 경험이 이 작품을 쓰게 한 것이다. 그래서 발표 당시 스탈린 치하의 강제수용소와 그 안에서 고통 받는 죄 없는 인간들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나 역시 처음에는 그렇게 읽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하면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지는 법인지, 요즘 다시 읽어보면 수용소의 하루가 딱 우리네 일상 같다. 더 편안한 침대에서 잠자고, 더 기름진 음식을 먹고, 더 좋은 작업 환경에서 일하는 것만 다를 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숨가쁘게 쫓기듯 살아가는 건 마찬가지다. 물질적으로는 풍요해졌으나 우리는 더 오랜 시간 더욱 필사적으로 일하고, 더 절박한 심정으로 더욱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다. 우리 스스로 마음의 감옥 속에 갇혀버린 부유한 노예 신세가 된 건 아닌지.

그렇다고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다시 작품을 보자. 수용소에는 여러 인간 군상들이 살아가는데, 다들 조금이라도 편하게 지내보려고 잔머리를 굴리고 잔꾀를 부리고 속임수를 쓴다. 하지만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다. 알료쉬카는 누가 무슨 부탁을 해도 싫다는 내색을 하는 법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슈호프에게 이렇게 말한다. “무엇 때문에 당신은 자유를 원하는 거죠? 감옥에 있다는 것을 즐거워해야 해요! 그래도 이곳에선 자신의 영혼에 대해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예의 저녁식사 장면에서 잠깐 나오는 키가 큰 노인, 이름도 없이 그저 죄수번호 유-81호뿐인 이 노인에게서 나는 희망을 발견한다. 다른 죄수들은 모두 새우등처럼 허리를 굽히고 있는데, 노인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다. 다른 죄수들은 국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먹는데, 노인은 수저를 높이 들고 먹는다. 다른 죄수들은 빵을 더러운 식탁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지만, 노인은 깨끗한 천을 밑에 깔고 그 위에 내려놓는다. 얼굴에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당당한 빛이 있다.

결국 살아가는 태도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아무리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가정하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이 노인처럼 행동할 수 있다.
창으로 비쳐 드는 오월의 햇볕이 솜털처럼 따사롭다. 나뭇잎은 눈부시게 푸르고 바람조차 향기가 느껴진다.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였던 앤 불린이 누명을 쓰고 단두대로 향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은 “아, 오월이군요!”였다.



박정태씨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와 서울경제신문, 한국일보 기자를 지냈다. 굿모닝북스 대표이며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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