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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주말] 디자이너 이상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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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상봉 디자이너가 20일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김과장, 전시장 가는 날’을 찾았다. 신예 작가부터 원로까지 참여한 행사에서 이씨는 1시간 넘게 시간을 보냈다. 평소 ‘이름값’을 따지지 않고 작품을 본다는 그다웠다. [박종근 기자]

주말 소개에 앞서 나이 얘기부터 해야겠다. 나는 누가 나이를 물어오면 늘 서른일곱이라고 답한다. ‘이상봉(Lie Sang Bong)’이란 브랜드를 만들고 정신없이 패션쇼를 준비하던 서른일곱 어느 날, 문득 여기서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의 경험치와 열정, 나만의 취향이 만들어지려 하는 그 나이가 좋았다. 앞으로도 딱 그렇게 살고 싶었다. 어쩌면 나의 주말도 그런 서른일곱과 닮아 있는 게 아닐까. 나만의 안목과 열정, 취향으로 채워지는 48시간이다.

토요일 지인 만났을 때 양식은 NO

 토요일 아침, 눈뜨는 장소는 집이 아닌 오피스텔이다. 10년 전부터 나는 ‘서울 기러기’ 생활을 했다. 평창동에 집을 두고 선릉역 근처인 사무실에 작은 원룸을 얻었다. 집에 머무는 시간에 비해 출퇴근길이 너무 멀기 때문이다.

 평소처럼 일단 사무실로 간다. 아직까지 완전한 주 5일을 지키지 못해서다. 그래도 낮 12시를 넘기진 않는다. 홀가분하게 일을 끝내면 일단 요기를 한다. 주말 브런치를 즐긴다거나 고급 레스토랑을 찾진 않는다. 지하철 선릉역 뒤의 일명 ‘선릉 먹자골목’만 들어서도 얼마든지 맛집은 많으니까. 순댓국·설렁탕 같은 한 그릇 음식이 보통 5000~6000원이니 한 끼 식사로 딱이다. 나는 귀한 손님이 찾아와도 1만2000원쯤 하는 생태찌개를 대접한다. 언젠가 후배가 찾아와 이 골목으로 데려갔더니 꽤 놀라는 눈치였다. 패션디자이너라고 하면 우아한 레스토랑에 갈 줄 알았단다. 하지만 나는 밥 먹는 데 시간을 오래 쓰는 게 아깝다. 양식을 먹자면 애피타이저-메인-디저트까지 즐겨야 하는데, 그렇게 한두 시간씩 쓰는 게 영 별로다.

 만족스럽게 배를 채우고 나면 꼭 들르는 곳이 있다. 바로 선릉이다. 서울 도심에 이렇게 한적한 산책로가 있고, 더구나 자주 올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직접 와 봐야만 알 수 있다. 호젓한 길을 천천히 걸으며 산책을 즐긴다. 아직 한낮의 땡볕이 비치기 전 한 시간 정도 걸으면 딱 적당하다.

시내 곳곳 나 홀로 전시장 나들이

이상봉

 사무실 주변을 벗어나는 오후부터가 진짜 주말이다. 일종의 ‘문화 탐험’이랄까, 벌써 10년 넘게 매주 전시장과 공연장을 누빈다. 대형 뮤지컬부터 소극장 연극까지, 신진 작가에서 거장의 개인전까지 두루 섭렵하려니 갈 곳이 넘친다. 제대로 그 분야를 공부한 적은 없다. 다만 패션과 가까운 듯 먼 듯한 문화공간들을 찾아다니다 보면 스트레스가 날아간다. 평소 백화점에 나가지도 않고, 텔레비전도 즐겨 보지 않기에 어쩌면 나의 유일한 오락거리다. 전시장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내 또래의 남자 관람객이 좀 많이 왔으면 싶다. 인생의 여유를 알고 느긋하게 예술을 감상하는 안목은 그들이 더 높을 텐데 말이다. 미술을 몰라도, 음악을 몰라도 일단 와 보면 새로운 삶의 즐거움이 느껴질 터다.

 주변 친구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대뜸 “뭘 봐야 할지 모르겠다”는 소리를 할 때가 많다. 내 경우엔 금·토요일 아침 신문을 샅샅이 살펴 정보를 얻거나 지인들로부터 받은 메일을 참고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름의 기준은 있다. 작가·출연진의 지명도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 남이 해 놓은 평가나 홍보문구보다 왠지 끌리는 ‘감(感)’을 믿는다. 혹여 그렇게 봤다 실망해도 상관없다. 그럴 땐 또다시 다른 전시나 공연을 구경하러 나서면 그만이다. 망친 붓칠 위에 다시 더 진한 색으로 덧칠하는 방법이랄까.

매주 이렇게 다니다 보니 청담동 갤러리나 코엑스 전시장 등이 내 집처럼 편해진다. 특히 예술의전당은 한 달에 두세 번씩 오곤 한다. 한가람미술관과 디자인미술관이 함께 있고 볼 만한 전시가 많아서다. 이곳에 오면 꼭 전시를 보고 카페에서 느긋이 커피 한 잔을 마신 뒤 계단을 올라 분수 구경까지 하게 된다. 굳이 공원까지 갈 필요가 없어 일석이조다. 한데 이런 나를 보고 사람들이 꼭 하는 소리가 있다. “혼자 다니는 게 심심하지 않으냐” “왜 아내와 따로 다니느냐”는 것이다. 물론 처음엔 아내가 동행을 했다. 그런데 그림 하나에 빠지면 10분이고 20분이고 줄곧 그 앞에서 서 있는 나와 함께 있기가 쉽지 않았나 보다. 아내는 “너무 힘들다”며 이내 자기만의 주말 스케줄을 따로 꾸렸다. 나와 한 지붕 아래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아내지만 나와 취향은 다른 것이다. 이후로 자연스럽게 ‘각자 플레이’를 하기로 했다. 고백하건대 요즘엔 혼자 다녀도 그리 외로운 걸 모르겠다. 어디를 가도 알아보는 분이 꽤 많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사인해 주면서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함께 사진 찍는 일도 은근히 재미있다.

2030 클러버들과 즉석 만남

 낮이 전시라면, 저녁은 공연이다. 역시나 뮤지컬·발레·연극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워낙 문화·예술계 사람들 중 친한 이가 많아 그들이 무대에 올리는 것만 봐도 챙겨 볼 공연이 많다. 어쩌면 나는 공연만큼 이후 벌어지는 뒤풀이에 가는 걸 더 즐기는지도 모른다. 한때 연극배우를 꿈꿨던 나의 대리만족이랄까(나는 서울예대 방송연예과를 졸업했다). 언젠가 나도 연극 무대에 서 보겠다는 꿈이 그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조금 더 자란다.

 뒤풀이에 가지 않을 공연이라면 간단한 요기를 하고 이태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태원은 요즘 핫플레이스가 많다. 방송인 홍석천처럼 친한 친구들이 이곳에 잇따라 음식점·카페를 차린 것도 이유면 이유랄까. 그중에서도 내가 즐겨 찾는 곳은 클럽 ‘뮤트’와 ‘글램’. 이 둘은 홍익대 앞 클럽과는 꽤 다르다. ‘물 관리’를 위한 연령 제한도 물론 없다. ‘뮤트’는 공연이나 다양한 퍼포먼스가 벌어지는 곳으로 유명하다. 나 역시 최근 컬렉션 뒤에 애프터파티를 이곳에서 열었다. ‘글램’은 편하게 음악을 듣기 좋다. 혼자 또는 여럿이 맘 편하게 들어가 음악과 흥을 즐길 수 있다. 40~50대의 밤 문화공간이 룸살롱만이 아니라는 걸 이곳에서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나 역시 지인들과의 만남을 이곳에서 잡기도 하고, 디자인·문학·광고 등의 분야에서 일하는 20~30대 클러버와 ‘즉석 만남’을 갖기도 한다. 그곳에서만큼은 공통의 관심사를 열 올려 나누는 ‘친구’일 뿐이다.

문화예술계 친구들과 ‘평창동 모임’

 토요일 새벽에 드디어 ‘귀가’를 한다. 그러고 나면 일요일 아침까지는 충전 또 충전이다. 오전 10~11시까지 숙면은 기본. 아침 겸 점심도 최대한 느긋하게 즐긴다. 유일하게 집밥을 먹는 때라 더없이 행복하다. 두부찌개, 생선구이, 무친 두릅나물, 올리브유를 듬뿍 뿌린 채소가 주된 반찬이다. 고기 한 점 없어도 최고의 보양식이다.

 한낮의 산책도 필수다. 호젓한 평창동 골목을 거닐다 집에서 가까운 가나아트센터를 들르곤 한다. 전시도 전시지만 건물 꼭대기의 야외 테라스 카페에서 잠시 쉬어가기 좋다.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스마트폰으로 여기저기 사진도 찍고, 어제 본 공연·전시의 간단한 감상평을 트위터(@lsbparis)에 올린다. 전문가의 감상은 아니지만 그게 오히려 부담스럽지 않다는 이들이 많으니 더 욕심을 내게 된다. 아차, 여기에 올 때마다 ‘해결과제’가 또 생각난다. 가나아트센터에 맡겨 둔 나의 보물들 말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하나 둘씩 모아 왔다. 한데 마땅히 들여놓을 데가 없어 맡겨 놓고만 있다. 조각·그림 말고도 작가 이삼웅·배세화 등의 가구가 많다 보니 이젠 창고를 지어야 할 판이다. 그래도 전시를 다니다 보면 자꾸 욕심이 생기는 걸 어쩌랴. 첫 개인전부터 눈여겨봤던 신진들이 커 가는 것을 지켜보며 나도 모르게 뿌듯해지는 게 일종의 ‘중독’이다.

 일요일 저녁엔 가끔 파티가 열리기도 한다. 절친들과의 만남이다. 내 스마트폰에 저장된 지인만 1000여 명. 하지만 정기적으로 만나고 멤버로 속해 있는 것은 딱 이 ‘평창동 모임’뿐이다. 전수천·임옥상·안석환 등 주로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속해 있다. 가수 김수철도 그중 하나다. 멤버들끼리 생일은 꼭꼭 챙기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한 달에 한 번꼴로 얼굴을 보게 된다. 만나는 장소 역시 늘 똑같다. 평창동의 ‘스위스’라는 레스토랑. 주인장과 친해지면서 영업시간을 훌쩍 넘긴 오전 1~2시까지 우리를 위해 문을 열어 준다. 그야말로 우리들만의 아지트가 생긴 것이다.

 오래간만에 친구들을 만났다고 비틀비틀할 정도로 만취하는 일은 거의 없다. 어쨌든 다시 오피스텔로 떠나야 하니까. 더구나 요즘엔 나의 ‘외도’ 때문에 일요일 늦게라도 사무실에 들어가 사람들을 만난다. ‘외도’는 다름 아닌 사진전이다. 30일부터 일주일간 청아아트센터에서 전시를 연다. 알고 지내던 사진가 최현준과 함께 의기투합해 페루의 자연경관과 인물사진을 선보인다. 패션디자이너의 새로운 도전이랄까. 그러니 행사를 코앞에 앞두고 관람객으로만 머무를 순 없다. 이번 주말만큼은 ‘사진가 이상봉’으로서 또 다른 주말을 보내려 한다. 

‘나의 아름다운 주말’ 속 그곳

● 예술의전당
서울 서초구 서초동 700 / 02-580-1300

● 뮤트(MUTE)와 글램(GLAM)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116-1(둘 다 해밀톤호텔 별관 디스트릭트 건물 내에 있다) / 02-792-6164

● 가나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평창동 97 / 02-720-1020

● 스위스
서울 종로구 평창동 435-2 / 02-394-5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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