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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New] 잠실 한양1차 아파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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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구 동양고고학연구소장

지하철 8호선을 타고 석촌역에 내려 송파사거리에서 방이동사거리 쪽으로 가다 보면 좌우로 대형 아파트단지가 나타난다. 왼쪽이 한양1차 아파트다. 이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는 해발 50m 언덕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꼭대기 근처에 ‘가락동 고분군’이 있었다.

1970년대 초 서울시 도시계획국이 문화재관리국과 손잡고 고고학자·역사학자들로 구성된 ‘잠실지구유적발굴조사단’을 만들었다. 1974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1차 발굴조사를 했다. 이어 1975년 8월부터 10월까지 가락동과 방이동 일대를 7개 지역으로 나눠 2차 발굴조사를 벌였다. 선사시대 유적 5개소, 석실분 6기, 방이동 백제고분 1기를 찾았다. 가락동 고분 중 4, 5호분은 도굴됐으며 석실 형태 일부가 남아 있었다. 6호분은 석실 하부뿐이었다.

가락동 4호분은 할석(쪼갠돌)으로 4, 5단까지 쌓은 석축이 있었다. 상하 2.3m, 좌우 2.6m크기며 동남향으로 연도(羨道, 묘 들어가는 길)가 달린 횡혈식(橫穴式, 굴모양)고분이다. 천장구조는 사각형 무덤 네 귀퉁이에 기다란 돌을 사선으로 덮어 모서리를 줄여 나가는 고구려 모줄임 양식을 사용했고, 가장 위에는 널찍한 큰 돌을 덮었을 것으로 보인다. 출토유물은 회색빛을 띤 파란색 큰 항아리 조각과 삿자리무늬 회색빛을 띤 누런색 연질토기 등 백제토기 조각 여러 점이다. 가락동 4호분 봉토에서 선사시대와 관련된 석재 방추차(紡錘車, 실 감는 도구), 착형(鑿形, 찍개) 석기, 무문토기 조각이 나온 사실로 미뤄 보아 선사시대부터 이 주변에 인류가 살았음을 알 수 있다.

1983년 필자(왼쪽에서 둘째)와 대학원생들이 5호 석실분을 살펴보고 있다.

가락동 5호분은 4호분에서 동북쪽으로 22m 떨어져 있으며 3기 중 가장 낮은 곳에 위치했었다. 남쪽으로 남한산성이 보였다. 무덤 널방(주검이 안치돼 있는 방) 바닥에 관을 올려 놓는 평상 또는 부장품을 놓는 시설도 발굴할 때 없었다. 다만 널방 중앙에서 북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베개로 보이는 돌 하나가 놓여 있어 자는 방향은 동쪽으로 보인다. 연도는 남향이며 출입구에 문을 달지 않고 돌로 막은 독특한 구조로 길이는 1.8m다.

5호분은 세 벽을 먼저 쌓고 한 쪽 면으로 드나들다 밖에서 벽을 쌓아 막는 횡구식(橫口式)고분이면서도 연도를 만들었다. 이는 횡구식고분이 연도가 붙은 석실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양식이라고 볼 수 있다. 널방은 방형에서 한쪽 면이 약간 길어진 형태였다. 방형 석실에서 장방향 널방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고구려 무덤 양식이 백제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4호분과 동일한 천장 모줄임 양식도 고구려 영향이다.

출토유물은 널방 중앙 바닥에 있던 금동환(金銅環) 4점이다. 지름 1.9cm 크기로 전면에 녹이 슬고 끝에 약 1cm 크기 고리가 달려 있다. 3점은 상태가 온전하고 1점은 꼭지가 부서졌다. 철칼은 널방 동남쪽에서 출토됐다. 길이 13.7cm, 너비 1.3cm다. 토기 조각은 널방 남쪽 입구 근처 바닥 판석 위에서 출토됐다. 기와 조각 여러 점도 찾았는데 봉토 남쪽 흙을 긁어 내다가 1점, 연도 벽을 드러낼 때 3점, 널방 안에서 12점이 출토됐다. 기와 조각은 모두 같은 형태로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표면은 새끼줄 무늬, 뒷면은 섬세한 직물 무늬다. 백제고분에서 기와가 출토되는 이유는 고분 위에 제사용 건물을 지을 때 사용된 건축부자재가 섞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5호분을 만든 시기는 4세기경이라고 추정한다. 금동환 출토는 매장자가 왕족·귀족일 수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가락동 4, 5호분 횡혈식 석실 구조는 석촌동 적석총 수혈식(竪穴式) 석실 구조에서 방이동 횡혈식 석실고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고분으로 볼 수 있다.

2012년 잠실 한양1차 아파트 모습

1983년 6월 필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연구생들과 함께 석촌동·방이동 백제유적 현황 조사를 하며 가락동 고분군도 알아봤다. 1975년 발굴 이후 방치된 채였지만 고분 구조와 형태는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이 고분군을 보존하려고 사방팔방 뛰어 다니다 7월에 다시 찾아가니 어느 새 아파트 건설로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얼마 전 국비로 부여백제문화단지가 조성됐다. 이 곳에 서울 한성백제 고분을 복원해 놓았다. 서울에도 고분공원을 조성해 한성백제 능묘문화 발달사나 변천사를 연구하는 교육장으로 활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고대 분묘유적은 혐오시설이나 기피시설이 아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역사유적이다.

글= 이형구 <동양 고고학 연구소장>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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