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의 삶을 그림과 함께 엮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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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여덟살 배기 소년이 있었습니다. 요즘처럼 차가운 날씨에 그는 따뜻한 옷도 넉넉한 식량도 없었지요. 그는 대궐처럼 웅장한 집 현관 돌기둥을 방패삼아 바람을 피했지만, 구멍난 외투 속의 온몸은 차갑게 얼어붙었고, 파랗게 질린 입술은 추위를 못 이겨 덜덜 떨었습니다.

그 소년이 바로 훗날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 최고의 화가로 성장한 프라 필리포 리피(1406-1469)입니다. 부모 없이 숙모에게서 자라던 그는 여덟 살의 나이로 가난과 허기를 못 이겨 수도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수도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워야 하는 라틴어를 배우지 못하고 그림을 끄적이기만 했습니다.

그가 끄적인 그림을 알아 본 수도원장은 필리포에게 그림을 가르칩니다. 그때부터 그는 대단한 열성을 가지고 그림을 그립니다. 그가 그려내는 그림은 차츰 주변 사람들의 눈에 들게 되지요. 시간이 흐르면서 필리포는 수도원 안의 누구보다 훌륭한 그림을 그려냅니다. 마침내 그는 수도원의 벽화를 그리게까지 되지요.

비천한 사람들을 그린 그의 그림은 여러 사람들로부터 '훌륭하다'는 평을 듣지만, 수도원장은 그것은 천국을 찬양하려는 수도원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호통을 칩니다. 그러자 필리포는 수도원 밖에서 살고 있는 수도자가 아닌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싶어합니다. 밤을 틈타 수도원을 탈출하는 것은 곧바로 이어진 일이지요.

'수도자가 아닌 사람의 세계'에 당도한 그는 성자와 천사가 아닌 그냥 '세상 사람들'을 그리며 마음껏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필리포는 세상 사람들을 수도원 밖에 남겨둔 채 수도원으로 돌아가 성자와 천사를 그리게 되지요. 수도원에서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는 세상 사람들을 그리워 하며, 때때로 수도원 밖으로 도망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산타 마르게리타 수녀원의 제단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고 그림에 착수합니다. 필리포는 수녀원장에게 성모님을 그리기 위한 모델로 수련기간도 끝나지 않은 어린 수녀 루크레치아를 모델로 보내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고, 원장 수녀는 흔쾌히 그의 부탁을 들어줍니다.

마침내 주문된 그림은 완성되지만 화가 수도자 필리포는 자신의 모델인 수녀 루크레치아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그녀와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게 됩니다. 그들 사이에서는 훗날 '바로크 예술의 선구자'로 일컬어질 화가 필리피노 리피가 태어납니다.

15세기 이탈리아 최고의 화가 프라 필리포 리피는 그렇게 평생을 솔직한 감정 표현을 바탕으로 살아가며, 그림을 그려냅니다. 그가 그린 그림들에 나오는 아름다운 성모의 얼굴은 그래서 수녀 루크레치아의 얼굴이 담겨 있습니다.

'그림만 보고 알 수 없는 액자 밖 화가 이야기'(에이미 스티드먼 지음, 강주헌 옮김, 작가정신 펴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림을 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림이 그려지기까지의 배경이나 과정과는 무관하게 눈앞의 그림 그 자체에서 느끼는 감정만을 중시하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그 그림 뒤에 감춰진 모든 이야기를 바탕으로 해석하는 방식이 있지요.

여기서 어느 쪽이 효과적인가에 대해 논할 수는 없지만, 그림 감상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 감상자들이라면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삶과 시대 배경 따위를 전제로 그림을 볼 때 훨씬 많은 느낌을 갖게 될 것이라는 것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그런 초보 감상자들에게 큰 도움을 줄 책입니다.

1백년 전인 1907년 '예술의 기사들:이탈리아 화가들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던 이 책은 '아름다운 것을 보면서 느낄 수 있는 커다란 즐거움을 잃지 말자'는 목적으로 쓰였습니다. 화가들의 삶과 그림 탄생의 배경을 앎으로써 그림 속의 아름다움을 더 잘 알아보자는 뜻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비너스의 탄생'으로 유명한 보티첼리를 비롯,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이탈리아 화가들의 삶을 소설처럼 흥미롭게 풀어 쓴 책입니다.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낸 화가들의 삶을 통해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배가하는 데에 시간을 투자할 의향이 있는 독자들에게라면 의미가 남을 책입니다.

고규홍 Books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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