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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내 삶의 구세주 힘들다 징징대지 마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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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호 07면

바버라 토버는 경복궁과 한국민속박물관을 순회하는 일정 내내 감탄사를 연발했다. 81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활기찼다. 패션에도 일가견이 있는 그가 착용한 스카프는 한국 자수의 명인 정영양 박사가 오래전에 준 선물이다. 전수진 기자

술고래 아버지, 무기력한 어머니, 텅 빈 냉장고. 미국 뉴욕 아트앤디자인 박물관 명예관장 바버라 토버(Barbara Tober·81)의 10대 시절을 지배하는 기억이다. 아버지는 그나마 그가 15세 되던 해 알코올 중독으로 숨졌다. 공부가 좋았고 글을 쓰고 싶었지만 돈을 벌어야 했다.

미 웨딩잡지 ‘브라이드’ 편집장으로 30년, 바버라 토버

주경야독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일은 15살에겐 벅찼다. 만 16세 때 원치 않는 결혼을 택했다. 나이가 한참 위였던 남편. 그의 매력은 별로였지만 재력은 양호했다. 애정 없는 결혼은 오래 못 갔다. 이혼과 방황. 그 와중에도 토버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주저앉는 대신 자기의 꿈을 좇는 길을 택했다.

줄곧 꿈이었던 출판계에 가까스로 입성한 그는 미국 웨딩 잡지 ‘브라이드(Bride)’에 입사했다. 커피 심부름, 복사, 전화 응대 등으로부터 시작해 조금씩, 하지만 착실히 실력을 쌓아나갔다. 결국엔 대학졸업장이 없는데도 편집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곤 30년간이나 그 자리를 지켜냈다. 광고 브로슈어에 가깝던 얇은 잡지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화번호부같이 두꺼운 책”으로 변모했다. 강산이 세 번 바뀐 후 그는 자진 은퇴했다. 새로운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트앤디자인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지금은 명예이사장이다. 그를 맞이한 후 아트앤디자인 박물관은 환골탈태했다. 건물도 새로 올렸고 이름도 공예박물관에서 아트앤디자인 박물관으로 바꿨다. 보석의 명가 티파니가 200만 달러를 들인 전시관을 오픈했고, 뉴욕시정부가 소중히 여기는 도시의 랜드마크가 됐다.

바버라 토버는 봄 기운이 완연하던 지난 4월 말 한국땅을 처음 밟았다. 뉴욕 맨해튼에서 한국 자수 전도사로 활약해온 정영양 박사와 막역한 친구라는 인연으로 방한했다. 숙명여대 정영양 자수박물관과 서울 삼청동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힘들다고 징징거릴 시간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를 악물었다.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게 됐다”고 했다.
세상에 대한 분노가 삶의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대답은 단호했다. “전혀 아니다.” 그럼 뭐였을까? 인터뷰는 그의 숙소인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 호텔 라운지에서 이뤄졌다.

-가난 때문에 한 맺힌 10대를 보낸 건가.
“전혀 아니다. 구세주가 있었으니까. 바로 내 일이었다. 닥치는 대로 일했는데 힘든 생활은 내게 시련을 견디는 법을 가르쳐줬다. 자기 단련만큼 중요한 건 없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것. 그 성실함이 나를, 내 가족을, 이 세상을 움직이는 엔진이다. 힘들어하며 징징거릴 시간이 어디 있나. 열심히 살기에도 바쁘고 짧은 게 인생이다.”

-글쎄, 하지만 힘들어하는 게 오히려 인간적이지 않나.
“힘들면 남 탓하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이긴 하다. 하지만 그럼 다른 사람과 다를 게 뭐가 있겠나. 힘들어 죽겠다고 말하는 게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도 아니다. 묵묵히 힘든 걸 견디고, 박차고 일어나라. 신발을 신고 미래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라.”

-어떻게 해서 잡지계에서 성공하게 됐나.
“한때 8가지의 허드렛일을 한꺼번에 한 적도 있다. 그중 하나가 출판계 일이었다. 처음엔 커피·복사 심부름부터 했다. 그런데 출판계에서 일하는 게 마냥 좋더라. 그래서 더 열심히 했고, 윗사람의 눈에 들어 ‘브라이드’ 잡지에 입사하는 꿈을 이뤘다. 입사 당시만 해도 얄팍했던 잡지가 내가 편집장을 30년 마치고 자진 은퇴할 때만 해도 뉴욕시 전화번호부처럼 두꺼워졌다.”

-잡지를 성공시킨 비결이 뭔가.
“기사만 잘 써선 안 된다. 물론 기사와 편집이 제일 중요하지만 편집장이라면 광고 매출에도 집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난 편집장이 된 후 우리의 독자·광고주를 60여 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했고, 각 분류마다 차별화된 전략으로 접근했다. 타협하지 않는 효율적 팀을 꾸리면 못 할 게 없다.”

-편집장을 30년 한 건 전설 수준인 듯한데.
“쉽진 않았다. 편집장 자리를 꿰차는 것도 고졸 학력 논란 때문에 힘들었다. 출판인이 7명이었는데 날 못미더워했다. 하지만 행동으로 보여줬고, 결국 그들은 몇 년 후 내게 ‘당신이야말로 적임자’라며 편집장 타이틀을 안겨줬다.”

-두 번의 이혼 경력을 갖고 ‘브라이드’라는 결혼 관련 잡지 편집장을 했는데.
“난 너무 어려서 결혼을 했다. 남편이 아닌 아버지를 찾으려 했고,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렇기에 더 ‘좋은 결혼’에 대한 열망이 컸다. 결혼 패턴에도 종류가 있다. 부부를 두 행성으로 비유해보면 궤도가 완벽히 일치하는 결혼, 궤도는 다르지만 접점이 있고 서로를 보완해주는 결혼, 궤도가 아예 어긋난 결혼이 있다. 우린 두 번째다. 제당 관련 사업을 하는 도널드와 나는 39년째 결혼 생활을 이어오며 서로가 함께 성장해왔다. 결혼은 동화가 아니다. 상호 이해를 기반으로 조심스럽게 맞추어 가는 현실이다.”(※남편 도널드 토버는 방한 일정 내내 바버라와 함께 했다. 아내의 말을 듣고 그는 아내의 손을 잡으며 “나보다 더 유명한 여자와 살 수 있다니, 얼마나 멋진 일이냐”며 웃었다. 그들의 생활은 뉴욕 타임스 스타일 면에서 취재해 보도했을 만큼 뉴욕 사교계에선 정평이 나 있다.)

-잡지에서 은퇴하고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긴 이유는.
“60대엔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었다. 당시 ‘공예박물관’이었던 곳에 무급 풀타임 명예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맨해튼 한복판의 이 멋진 공간을 새롭게 변신시키고 싶었다. ‘꼭 이걸 지금 해야 하느냐’며 박물관 실무진이 반대했지만 재건축 작업에 들어갔다. 풍수지리 전문가까지 초빙하는 등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고, 결국 뉴욕의 명소로 탈바꿈했다. 반대했던 사람들도 지금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한다.”

-첫 방한에 대한 소감은.
“중국·일본에 대해선 잘 알았지만 한국에 대해선 잘 몰랐다. 중국·일본과 비슷비슷할 거라 짐작했을 뿐이다. 그런데 웬걸, 내가 완전히 틀렸다. 한국은 나름의 방식으로 환상적으로 아름답다. 난 외국에 가면 제일 먼저 박물관엘 간다. 이번에도 내 친구인 정영양 박사의 숙명여대 내 자수박물관부터 삼성미술관 리움, 국립중앙박물관과 한국민속박물관과 경복궁을 둘러봤다. 타이트한 일정이었지만 전혀 힘들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훌륭한 기회였고, 꼭 다시 오고 싶다. 한국만의 멋을 살린 옷도 꼭 사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었던 게 아쉽다. 다음엔 아주 커다란 빈 여행가방을 들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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