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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거장들의 분신, 어떤 역할도 해내는 대체 불가능한 배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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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호 06면

배우는 감독의 도구라고 했다. 특히 본인처럼 늙은 배우라면 주어진 역할을 마다할 여유는 더욱 없다고 했다.일평생 연기를 업으로 삼은 윤여정(65)은 배우란 존재를 애써 포장하지 않았다. ‘벗으라면 벗고, 입으라면 입고, 애드리브 따위는 하지 않는’ 감독의 세계 안에서 기꺼이 그의 분신이 되어주는 것이 연기 철학이라면 철학이라고 했다.

그게 비결이었을까. 윤여정이 생애 두 번째로 세계 영화인의 축제인 프랑스 칸 영화제에 간다. 그가 출연한 ‘돈의 맛’(임상수 감독)과 ‘다른 나라에서’(홍상수 감독) 두 편이 제65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2년 전 ‘하녀’(임상수 감독)와 ‘하하하’(홍상수 감독)로 칸의 레드카펫을 밟은 데 이어 이번에도 두 ‘상수’ 감독의 작품으로 칸의 여인이 됐다.

‘돈의 맛’에서 그는 젊은 남성의 육체를 탐하는 악한 재벌을 연기했고, ‘다른 나라에서’는 전북 부안에 여행 온 프랑스 여자를 상대하는 촌부역을 맡았다. 두 작품 다 촬영은 쉽지 않았다. 한쪽에선 난생처음 아들보다 어린 배우와 정사신을 찍었고, 다른 쪽에선 드라마 촬영 직후 하루도 쉬지 못한 채 부안으로 내려가 이자벨 위페르와 영어로 연기를 해야 했다. 지난 2일 ‘돈의 맛’ 개봉을 맞아 만났던 그는 “죽기 전에 다하고 가라는 계시였나 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배우로서 꿈이 없다. 어린 시절 ‘청춘의 심볼’부터 안 해본 역할이 없다. 무슨 꿈이 남아있겠나. 어떤 역이든 들어오면 하는 거지”라고도 했다.

예순을 훌쩍 넘겼지만 벗으라면 벗는 이 쿨한 여인에게 감독들이 러브콜을 보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터다. 하지만 그뿐일까. 다소 사나운 인상과 허스키한 목소리의 이 배우는 그 연배의 다른 여배우들과 대체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그는 희생과 순종의 아이콘보다는 속수무책 바람난 엄마가 어울리고, 대자연을 보듬는 넓은 아량의 소유자보다는 심통 부리는 푼수 할머니가 더 잘 맞는다. 특히나 젊은 시절, 그는 김기영 감독의 작품에서 전통적인 여성상을 거스르는 역할로 입지를 굳힌 배우였다. 최근 드라마에서 줄곧 어머니 역할을 맡았지만, 누구도 그의 이름 앞에 ‘국민엄마’란 애칭을 붙이지 않았다. TV 속 어머니상을 재탕하기 싫은 젊은 영화 거장들이 그를 탐하는 이유는 그래서다.

윤여정은 16일 ‘다른 나라에서’의 시사회에서 “일하는 순간보다는 밥 먹고 쉬는 시간이 더 즐겁다. 후배들은 일하는 순간이 행복하다고 해서 반성하고 있다”고 말해 객석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그는 줄곧 꿈이 없어 시키는 건 다 한다고 했지만, 어쩌면 한국 영화는 그런 그로 인해 꿈을 꾸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젊은 거장들이 이 대체불가능한 윤여정이란 ‘도구’에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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