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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그때 기자들은 어디 있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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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권석천
논설위원

“언론에서도 뭐든 들은 얘기가 있었을 거 아닙니까.” 그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지난주였다. 검사 출신 변호사와 만나 파이시티 사건을 화제에 올렸다. 5~6년 전 일인데 검찰이 왜 진즉 수사에 나서지 못했는지 궁금했다. 그는 “정치적 눈치를 봤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고 했다.

 “검찰이 ‘대통령의 멘토’(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나 ‘왕차관’(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에게 손을 대기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눈앞에 빤히 비리가 보이는데도 수사를 안 했을 가능성은 작다. 젊은 검사들부터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그는 “검찰은 증거가 있어야 수사를 할 수 있다. 임기 말이 가까워져야 검은돈을 주고받은 사람들 사이가 틀어지고 증거가 나온다”고 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선뜻 동의하긴 어려웠다. 그는 오히려 언론이 왜 실세들의 비리 의혹을 제기하지 못했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것이 내가 말을 머뭇거린 이유다.

 나는 파이시티에 관해 아는 게 없었다. 하지만 박영준 전 차관이 ‘왕(王)’이란 수식어를 달고 다니며 기업 인사에 개입한다는 소문은 접했다. 최시중 전 위원장의 양아들이란 사람이 여기저기 기웃거린다는 얘기도 어렴풋이 들은 바 있다. 만약 크고 작은 풍문을 단초 삼아 취재에 들어갔다면 몸통은 아니더라도 깃털 정도는 잡지 않았을까. 민간인 불법사찰 재판이 진행되던 때 나는 법원을 취재하고 있었다. 사찰 문건이 수사 기록에 첨부돼 1심, 2심을 거쳐 대법원에 가 있었지만 사건의 궤적을 추적할 마음을 품지 못했다. 문제의 문건은 4·11 총선을 앞두고서야 튀어나왔다. 통합진보당 부정경선도 마찬가지다. 진보세력 내부의 비민주성이 어느 날 갑자기 돌출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팩트는 가차 없다.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환부는 곪을 대로 곪게 된다. 파이시티 사건과 통합진보당 사태엔 워치독(watch dog·감시견) 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한 언론의 책임도 있다. 이런 상황은 지난 4년간 언론이 진영 논리의 포로가 됐다는 비판을 받아온 것과 무관치 않은 것 같다. 한국의 언론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특히 2008년 촛불집회를 거치며 나뉘고 갈라졌다. 보수 쪽에 가까운 매체는 진보세력의 잘못을 강도 높게 비판했지만 보수세력엔 상대적으로 관대했다. 진보 쪽 매체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치세력들은 “좌파에 도움을 주려는 거냐” “보수의 프레임에 넘어가면 안 된다”며 그런 상황을 즐겼다. 시간이 흐르자 다른 매체에 뭐가 나와도 “그건 우리가 쓸 게 아닌데…” 하고 넘겨버렸다. 대신 스마트폰 세상에서 유명 인사들의 트윗을 실어 나르는 데 바빴다.

 취재는 육체 노동인 동시에 정신 노동이다. 약간은 과잉의 열의와 적극성 없이 은폐된 진실에 다가서기 어렵다. 제도권 언론이 보고 싶은 사실에 안주하는 동안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 ‘나는 꼼수다(나꼼수)’ 같은 유사 언론이었다. 나꼼수에 출연하는 시사IN 주진우 기자는 자신의 책 『주기자』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기사는 편파적이다. 하지만 편파로 가는 과정은 냉정하고 치열하다. …나는 힘을 함부로 쓰는 자들에게 짱돌을 계속 던질 것이다. ‘넌 정말 나쁜 XX야’ 쫓아가서 욕이라도 할 것이다.”

 거칠고 생경하다. 나는 나꼼수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방식을 지지하지 않는다. 다만 순치되지 않은 그 근성만큼은 인정하고 싶다. 제도권 언론이 죽도 밥도 아닌 무언가에 위축돼 있을 때,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자기검열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의 ‘쫄지마’ 정신은 대중 속을 파고들었다.

 오랜만에 신문·방송사들이 비슷한 주제를 놓고 경쟁하기 시작했다. 그 원인이 임기 말의 예외적 시공간에만 있다고 믿고 싶지 않다. 기자들이 다시 팩트와 근성으로 특종 싸움을 펼쳤으면 한다. 그리하여 동료·후배 기자들 가운데 수퍼 히어로가 나오길 기대한다. 아니, 절박하게 염원한다. 그래야만 우리 언론에도 새로운 희망의 지평이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