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책의 흐름] '미국 헤게모니' 언제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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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벽두에 세계 유일의 강대국 미국을 바라보는 우리의 심정은 착잡하다. 강한 미국을 천명한 부시 차기 대통령, 그가 보수파 관료들과 함께 펼칠 것으로 예상되는 강성 외교정책이 한반도의 장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전망 때문이다. 패도(覇道)적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할 것을 요구하는 시점이다.

이런 면에서 미국의 ‘세계 경찰’의 지위 확대를 위해 강경노선을 고수해온 대표적 인물인 브레진스키의 저서 ‘거대한 체스판’을 다시 꺼내 미국의 속내를 짚어보는 의미는 각별하다

이 책은 보다 장기적이고 거시적 관점이다. 그는 탈냉전 이후 미국의 초국가적 헤게모니를 새로운 천년에도 어떻게 지속시킬 것인가를 철저히 자국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다룬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에서 한반도는 미국의 국익에 종속되는 체스판 위의 주요 변수일 뿐이다. 아름다운 나라(美國)의 은총과 같은 순진한 상상은 아예 접어둬야 옳다. 특히 저자가 카터 대통령 시절 외교정책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정치 리더들의 노골성을 엿볼 수 있는 텍스트다.

'21세기 미국의 세계전략과 유라시아' 라는 부제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의 주요 타깃은 유럽과 아시아다. 세계 인구의 75%, 세계 총생산의 60%, 세계 에너지자원의 4분의3을 차지하고 있는 유라시아, 이 지역에서 미국의 권위를 넘보는 세력이 형성되지 못하도록 잘 관리하는 것이 미국 외교의 핵심이다.

브레진스키가 펼친 세계 지도라는 체스판에서 프랑스.독일.러시아.중국.인도가 가장 경계해야 할 국가들이다. 우크라이나.아제르바이잔.남한.터키.이란은 그 다음으로 중요한 지정학적 추축으로 설정된다.

미국이 가장 우려하는 상황은 "현재 진행중인 유럽의 정치적 통합이 반미(反美)적 성격으로 촉진될 가능성,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이슬람 진영이 연대해 미국을 견제해 올 가능성, 중국과 일본이 '과거 대동아공영권을 연상시키는 '반미적 아시아주의에 기울 가능성" 등으로 묘사된다.

국제외교라는 체스 게임의 주요한 참가국으로 우리가 선정되었다고 안도하기엔 이르다. '체스판 위의 말(馬)' 에 불과한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번역자 김명섭(한신대 국제관계학과) 교수의 지적처럼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냉혹한 시선" 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지도적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전세계적 무정부 상태가 도래할 가능성을 지적하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이 점에서 사무엘 헌팅톤의 '문명의 충돌' (김영사)과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국제적 법질서의 붕괴, 인구 폭발, 빈곤에 따른 이민, 범죄의 세계적 증가, 극도의 도시화, 인종과 종교적 적대감 그리고 대량 살상무기의 확산 등이 초래할 파국적 영향은 민족국가적 단위에선 해결할 수 없고, 지속적이고 직접적인 미국의 개입만이 세계적 무질서를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소장 정치학자 구춘권씨가 지적했듯이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군비축소와는 반대방향으로 진행되며, 그 결과는 국가미사일방위(NMD) 또는 전역미사일방위(TMD)체계의 확장으로 연결" (진보평론 2000년 겨울호 '문명의 충돌과 공존' )될 수 있다.

세계를 경략해본 노련한 외교전문가가 앞으로 미국을 이끌어갈 젊은 학생들에게 헌정한 이 책에서 미국의 오만함에 정서적으로 또 이성적으로 역겨움을 느끼는 데서 그친다면 지난 시절 감정적 반미에 머물고 말 것이다.

객관적으로 우리에게 브레진스키와 같은 거대한 안목을 지닌 국제 전략가는 누구인가.

김교수의 지적처럼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어떻게 고민하고 있는지 그 방법과 자세를 깊이 들여다 보고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천착해 보는 일" 이 21세기 벽두에 착잡한 심정을 넘어 진정 극미(克美)를 향한 먼 길을 모색해야 하는 우리의 자세여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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