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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살아갈 이유를 찾게 하자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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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호 31면

교육과학기술부의 잇따른 학교폭력 대책 발표에도 불구하고 폭력이 수그러들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정책이 현장의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해도 클리닉 현장에서 느끼는 체감온도는 여전히 낮다. 보복이 두려워 말을 못하는 초등학생, 오랫동안 피해를 당하다가 이번에는 가해자가 되어 법정에 서게 된 청소년 등 여전히 우리 아이들은 고통을 받고 있다.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를 당한 아이들이 그 사실을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드러내도 비난 받지 않고, 누군가 진심으로 공감해주고 실제적 도움을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피해를 본 아이들이 즉각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학교가 치료 의뢰 체계를 갖추고 의무적으로 이를 실행해야 한다. 그리고 교사를 포함하여 학생들과 접촉하는 사람들이 폭력이나 자살 위험을 지닌 학생을 빨리 감지할 수 있도록 민감도를 키워야 한다. 폭력 피해 증후나 자살 경고 증후 등을 알 수 있도록 자살예방 기술 훈련을 정기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중장기적으로는 아이들의 정신건강을 높이기 위한 인성교육이 초등·중등·고등학교 시기별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교육의 성패는 교육 방법에 달려 있다. 주입식 강의가 아니라 경험하고 직접 느끼는 학습법을 사용하고 전 교과과정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야 한다. 예를 들면, 국어시간에는 장애로 인해 힘들었던 경험을 쓴 작가의 글을 읽고 느낀 점을 이야기하며 약자에 대한 배려를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생물시간에는 죽은 고릴라 새끼 사체를 안은 채 며칠씩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애도하는 동물원의 어미 고릴라 이야기를 통해 소중한 대상을 잃었을 때의 힘든 마음을 이해하고 그 마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정신건강이 좋아지면 학교폭력, 자살 같은 문제들이 줄어들 수 있다. 정신건강 문제는 드러나기 전에 조기 발견하여 치료하면 쉽게 치료가 되고 이미 생긴 문제도 제대로 치료하면 후유증을 줄일 수 있다. 그런데 그 길목을 정신건강에 대한 편견과 선입관이 막고 있다.

최근에 일부 유명 연예인이 정신건강 문제를 갖고 있다고 고백하여 이 장애물을 조금씩 낮추는 데 기여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학조사에 의하면 3명 중 1명이 정신건강 문제를 갖고 있다.

누구나 큰 스트레스를 겪거나 작은 스트레스라도 지속적으로 이어져 쌓이면 정신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잘못된 선입관에 희생되어 치료 시기를 놓치거나 검증되지 않은 치료에 시간과 경제력을 낭비하고 문제를 키우는 경우들을 많이 본다. 범사회적으로 이제는 정신건강 문제를 중요시하고 누구나 생길 수 있는 정신 건강 문제를 터놓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아이들이 정신건강에 대해 알고 말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심리상태가 위험에 처했을 때 이를 알고 도움을 청할 수 있다.

학교폭력과 아이들이 자살하는 데는 학생과 교사, 학부모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잘못이 있다. 내 아이만 생각하는 부모들, 화를 포함해 힘든 감정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주지도 보여주지도 못하는 어른들, 국회에서 막말과 몸싸움을 하는 국회의원들은 우리 아이들에게 목소리 큰 사람, 힘센 사람이 이긴다는 메시지를 준다. 교실에서는 성적이란 다른 종류의 힘이, 순위를 세우는 경쟁 위주의 현실이 강자는 약자를 무시하고 지배해도 된다는 논리를 아이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다.

아이들과 대화하며 고운 말의 시범을 보이는 부모는 아이들에게 감정 교류라는 언어의 소중한 힘을 가르쳐준다. 힘들어하는 친구가 있으면 도와주라고 말하는 부모, 장애가 있는 학생에게 편견 없이 대하는 선생님, 모든 학생이 각자의 장점이 있는 특별한 존재임을 알게 해주는 선생님, 타인에 대한 폭력은 물론 자신에 대한 폭력도 허용하지 않음을 단호하고 분명하게 말하는 학교,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실제 도와줄 수 있는 학교가 있다면, 그리고 절망에 빠져 사방이 막힌 암흑 속에서 마지막으로 손을 내밀 때 그 손을 잡아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우리 아이들은 살아갈 이유를 찾을 것이다.



곽영숙 서울대 의학박사. 국립서울정신병원 소아정신과장, 제주대 의학전문대학원 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소아정신의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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