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원권 현금 56억원이 실린 승용차를 별장에 세워두고 인근 호텔에서 잠을 자는 사이에 동행했던 친구가 돈을 훔쳐갔다.”
이른바 ‘56억원 도난 사건’에 대한 김찬경(56·구속) 미래저축은행 회장 측 주장이다. 누가 들어도 선뜻 믿기 힘들다. 검찰의 시각도 별반 다르지 않다. 검찰은 이 사건이 김 회장의 자작극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9일 김 회장을 상대로 돈의 행방을 추궁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이 사건 진행 과정과 김 회장의 진술 등을 검토해 보면 석연치 않은 점이 적지 않다”며 “김 회장이 친구와 짜고 돈을 해외로 빼돌리거나 국내 모처에 숨겨놓고 자작극을 벌였을 수 있다고 보고 수사 중”이라고 말했다.
이 사건은 지난달 8일 충남 아산경찰서에 도난 신고가 접수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아산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박모(47)씨는 당시 “아산 건재고택(建齋古宅) 주차장에 승용차를 세워뒀는데 건재고택 관리인인 김모(57)씨가 차 유리창을 깨고 3500만원을 훔쳐갔다”고 신고했다. 하지만 경찰 조사에서 승용차가 김 회장 소유로 밝혀지자 박씨는 “김 회장을 대신해서 신고를 한 것”이라고 실토했다. 뒤이은 조사 과정에서 도난당한 돈은 3500만원이 아니라 56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지방 문화재인 건재고택은 미래저축은행이 대출 담보로 잡은 것이나 현재는 김 회장이 아들 명의로 이전해두고 별장처럼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회장 측은 “김씨가 도주한 이후 전화를 걸어 ‘돈을 돌려주겠다’고 했다가 ‘비자금이라 신고도 못할 테니 내가 일부 가져야겠다’고 말을 바꿨다”고 주장하고 있다.
검찰은 56억원이라는 큰돈을 차에 둔 채 잠을 잤다는 주장이나 절도범으로 지목된 김씨가 김 회장의 오랜 고향 친구라는 점, 영업정지를 불과 한 달여 남기고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 등으로 볼 때 김 회장 주장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하고 있다. 김씨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도 의심을 사고 있다. 김 회장이 비자금을 빼돌려놓고 도난 사건을 가장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무기상 김영완 자택 도난 사건 닮은꼴?=검찰은 이 사건이 김대중 정부 시절 대북 송금과 현대 비자금 사건의 핵심 인물인 김영완(59)씨가 2002년 3월 집에서 떼강도들에게 털렸다고 신고한 사건과 흡사하다고 보고 있다. 김씨는 그해 말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91억원어치의 양도성 예금증서(CD)와 현금·수표 등 7억원을 도난당했다”고 신고했고 털린 돈이 180억원이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당시 김씨의 운전사가 ‘집안 내부 사정과 금품을 털어도 신고를 못할 것’이라는 정보를 제공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검찰은 김씨가 도난 시점으로부터 9개월 뒤에야 신고한 점 등이 석연치 않다고 보고 조사를 진행했지만 김씨가 해외로 도피하는 바람에 진위를 확인하지 못했다. 검찰 관계자는 “김씨가 최근 귀국해 검찰 조사를 받았지만 돈의 행방에 대해서는 여전히 서로의 주장이 엇갈려 진실을 알 수 없다”며 “ 도둑을 맞았다는 김 회장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박진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