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생각 한평생 … “백수연 해드릴게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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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분 할머니는 지금도 텃밭을 일구십니다. 9남매를 키우시느라 쉴 틈 없으셨을 터인데 여전히 “지식들에게 야채를 먹여야 건강해진다”며 텃밭에 나가십니다.

최근 천안에서 졸수연(구순잔치)이 열려 다녀왔습니다. 잔치의 주인공은 천안에서 조그만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서정만(49)씨의 어머니 배영분 어르신입니다.

정만씨의 어머니는 슬하에 모두 5남4녀, 9남매(사남은 5년 전 사망)를 두었습니다. 첫째인 정순(여)씨가 올해 73세이니 막내 정만씨와는 24년 차 띠 동갑입니다. 잔칫날에는 8남매 중 7명이 모였습니다. 멀리 부산에 사는 차남 정석씨는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이날 참석 치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7남매와 함께 온 40여 명의 손자와 증손자, 이웃들까지 하객이 모여 그야말로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어머니는 장남 정기(64)씨의 등에 업혀 하객들과 춤을 췄고 술에 취해 노래도 한가락 멋들어지게 불렀습니다.

원폭 버섯구름 본 뒤 밀항선 타고 귀국

어머니 배씨는 15세. 아버지 서병희(6년 전 작고)는 17세에 백년가약을 맺었습니다. 이후 6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70년을 해로했습니다.

결혼 후 부부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일본에 건너가 생활했습니다. 힘든 타국생활을 하던 중 서씨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먼저 귀국하게 됐고 그 사이 해방이 됐습니다.

어머니 배씨는 당시 히로시마 인근 지역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버섯 구름이 올라오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고 합니다. 해방 후 어머니는 젖먹이 두 딸과 함께 밀항선을 탔고, 16일 만에 극적으로 고향 땅을 밟았습니다. 오랜 기간 배 안에 숨어 지내면서 엉덩이가 다 해어질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고향인 천안에 정착한 부부는 농사를 지으면서 9남매를 키웠고 자식들 굶기지 않고 공부 가르치려 애썼습니다. 덕분에 자식들 모두 행복한 가정을 이뤘고 사회에서도 제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습니다.

배 할머니의 구순잔치 모습.

“순리대로 해라” 가르침 가장 큰 자산

어머니는 지금도 “자식들을 챙겨 줘야 한다”며 손수 텃밭을 가꿉니다. 평생 동안 9남매 뒷바라지 하느라 쉴 틈이 없었던 어머니입니다.

 그런 어머니가 90세의 나이에 150cm도 안 되는 몸을 놀려 채소를 키웁니다. 어머니는 손수 가꾼 채소를 자식들에게 내놓으며 변함없이 “자식들 건강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생전에 아버지는 “항상 겸손하고 남을 배려 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아버지는 일생 동안 남에게 폐를 끼치고 신세지는 일을 경계하며 살았습니다. 어머니 역시 자식들이 누군가와 다툴 일이 생기면 “순리대로 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정만씨는 “그 동안 인생을 살아 오면서 부모님의 가르침이 가장 큰 자산이 됐다”고 말했습니다.

 6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생전에 “막내아들(정만씨) 슬하에 아들이 없어 마음이 걸린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정만씨는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소원을 들어 들여야 한다”며 마흔을 넘겨 늦둥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정만씨는 “지금 생각해도 잘 한 일 같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손자를 안겨 드렸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8남매는 어머니가 오래도록 건강하기만을 기원합니다. 아직 못해드린 효도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2~3년 전만해도 손자들 이름까지 빼놓지 않고 기억하시던 어머니가 최근 몇 년 새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아 걱정입니다.

 8남매는 구순잔치가 끝나갈 무렵 어머니에게 약속했습니다. “앞으로 9년 뒤 꼭 백수연을 열어 드릴게요. 어머니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이날 행사에 참여한 마을 사람 중 한 사람은 “배영분 어르신은 정말 대단한 분이시다. 바라만 보고 있었도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신다. 오래도록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시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8남매와 주민들의 바람이 이뤄져 9년 뒤 백수연을 다시 취재할 수 있기를 소원해 봅니다.

장찬우 기자
사진=조영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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