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의사 아들이 엮은 '어머니 사진 100장' 감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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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쉰을 넘긴 피부과 의사는 어머니에게 살갑지 못했다. 안부 전화도 10분을 넘겨 통화한 기억이 없다. 통화 중에도 말을 거는 건 대부분 어머니 몫이었다. “아범은 건강하냐, 며느리는 어떠냐, 손자 성적은 괜찮고?” 등등의 질문에 아들은 그저 짧게 답하고 입을 닫았다. “사랑합니다”란 말은 엄두도 못 냈다. 항상 전화를 끊고 남는 건 아쉬움과 후회였다. 좀 더 이야기를 해 드릴 걸….

 지난 1월 아들은 어머니가 올해로 팔순이란 걸 문득 깨달았다. 어느새 그렇게 됐나…. 4월 말 생신을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뭘 선물해 드리지? 언젠가 부모님 집에서 봤던 앨범이 떠올랐다. 켜켜이 쌓인 먼지를 치우고 앨범을 열었다. 사진엔 80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아닌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이렇게 예쁘고, 똑똑한 여성을 어떤 남자가 좋아하지 않았을까.

 서울대 의대 피부과 정진호(53) 교수가 어머니 사진을 모아 책을 만들기로 한 건 바로 그때였다.

이효숙 여사와 아들 정진호 교수.

정 교수는 다른 남매들과 함께 어머니 이효숙 여사의 사진 200여 장 중 100장을 엄선했다. 그렇게 해서 지난달 말 『울엄마』란 제목의 책이 나왔다. 사진마다 정 교수가 직접 글을 써서 붙였다. 다른 형제들도 감사의 글을 남겼다. 정 교수 집안은 ‘의사 가족’이다. 정 교수 이외에 다른 남매 둘도 의사다. 정 교수의 아버지 정규철(84) 박사 역시 가톨릭·중앙대 의대 교수를 역임했다. 정 교수는 자식들이 잘 자랄 수 있던 건 어머니의 헌신 덕분이라고 했다. 이 여사는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한 당대의 엘리트였다. 정 교수 표현에 따르면 60년 전 어머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꿈이 있는 신세대 여성’이었다.

 하지만 자식을 위해 일과 꿈을 포기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그 이상으로 더 중요한 일을 했다”고 평소에 말씀하셨단다. 이 여사는 “자식들이 무사히 장성한 것만으로도 만족하는데 내 인생을 사진으로 정리해줘 놀라울 따름”이라며 “요즘은 시간 날 때마다 책을 반복해 읽으며 행복에 젖는다”고 했다.

 정 교수는 “아들 도리를 해보려고 낸 책이지만 오히려 느낀 게 많았다”고 말했다. 책을 전해 받은 주위 제자·동료들의 반응 때문이다. 많은 이가 자신들의 어머니 생각이 나는지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책을 본 뒤 곧바로 어머니께 편지를 썼다는 사람도 있었다. 정 교수는 “나 역시도 앨범을 들추며 추억에 잠기고 많이 울었다”며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감정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아버님이 사진을 잘 보관해 책이 훌륭히 나왔다. 책은 사실상 아버지 작품”이라며 공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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