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 시대? 기업 내공과 경영진 자질을 봐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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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호 22면

극소수 우량주의 주가만 오르고 대다수 종목이 소외받는 국면이 지속되자 개인투자자들의 증시 이탈이 가속화하고 있다. 개인 비중이 큰 코스닥 시장의 급락세가 그 한 단면이다. 이를 부추긴 주가 양극화의 저변에는 한국 경제가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어 주식 투자 매력이 줄었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하지만 그래도 투자자들은 주식에 기대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를 차근차근 설명하기 위해 좀 긴 서설을 붙이겠다.

증시 고수에게 듣는다

저성장 시대가 왔다는 진단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한국 경제는 30년 넘는 고도 성장기를 뒤로 하고 저성장 단계로 진입했다. 우리 경제의 잠재 성장률은 지난 10년간 꾸준히 하락해 연 4%에 미치지 못한다. 경제 규모도 세계 10위권에 들 정도인 만큼 급속도의 팽창이 어렵다. 인건비와 땅값 등 생산요소 비용도 비싸졌고 전통 산업도 대부분 성숙 단계라 신규 설비투자도 잘 늘지 않기 때문이다. 인구 측면에서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저출산 노령화의 길을 걷고 있다.

한국 경제의 성장률이 급격하게 감속하던 지난 10여 년은 개인투자자에게 매우 힘든 기간이었다. 일자리와 소득이 그리 늘지 않는 가운데 집값과 생활비가 엄청 올랐다. 퇴직 연령은 갈수록 앞당겨지고, 은퇴 후 자영업으로 돈 벌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무리해서 집을 장만했더니 이제는 집값이 떨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투자자들이 주식시장을 외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주식시장은 ‘성장’이라는 꿈을 연료 삼아 돌아가는 공장과 같기 때문이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개인투자자 대다수는 경제적인 박탈감과 열패감에 빠져 있다. 고속도로를 시속 100㎞로 달리던 자동차가 시속 50㎞ 정도로 달려야 하는 2차선 지방도로에 접어들었을 때의 답답함이나 짜증이다. 과거에 대한 향수, 소위 ‘고속도로 증후군’이라는 증상이 한국 경제의 지난 10년 분위기였다. 글로벌 수출 대기업 등 일부 부문을 제외하면 우리 경제 전반에 대한 자신감과 낙관론이 사그라졌다.

하지만 ‘경제 성장률이 떨어져 주식 투자 매력이 줄었다’는 말을 이 시대의 대명제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주식 투자 수익률이 경제성장률 추이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연 8~9%대 고도성장을 거듭하던 1990년대의 한국 경제를 돌이켜 보자. 10년 내내 주가가 약세를 보이다가 급기야 97년 외환위기를 맞아 코스피가 270선까지 폭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중국의 최근 10년의 연평균 경제 성장률은 10%를 웃돌았다. 그런데 상하이 주식시장의 지난 10년간 연평균 주가 상승률은 5%에도 미치지 못한다. 어느 국가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과 주가 상승률은 의외로 상관관계가 약하다. 주식 투자는 기업의 가치에 투자하는 것이지 국가의 경제 성장률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실제로 지난 몇 년간 높은 경제 성장률 수치에 혹해서 중국·베트남·인도 등지의 해외펀드에 돈을 넣었다가 국내 주식형 펀드보다 훨씬 못한 성과를 접하고 낙담한 투자자가 어디 한 둘인가.

사실 경제 성장률이 뚝 떨어졌던 지난 10년 동안 우리나라의 일반인들은 가계를 꾸려가거나 주식 투자를 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기업들엔 호시절이었다. 수출 기업을 중심으로 이익이 눈덩이처럼 불었고, 세계 시장 점유율도 급증했다. 일본을 압도하는 산업이 속출하는 것도 고무적이다. 주가가 몇 배씩 오른 회사들도 즐비하다. 경제가 어렵다고 느끼는 시중의 정서와는 동떨어진 현상이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저성장 시대가 우량기업의 주가에 더 우호적 환경을 조성한 셈이다. 경쟁 기업들이 도태되면서 선두 기업들의 시장 지배력과 가격 결정권이 훨씬 강화됐다. 선두권 기업들이 설비투자를 덜 늘리고 부채를 줄이니까 내부에 현금이 많이 쌓였다. 이 돈으로 투자자 배당도 늘렸다. 고성장 시대에는 만성적 자금 부족으로 금리가 높았지만 저성장 시대에는 금리가 크게 떨어져 주식 가치가 저절로 올라간다. 증시 수급 측면에서는 기관투자가들이 검증된 우량기업에 집중 투자하기 때문에 해당 기업의 주가는 같은 업종의 다른 기업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프리미엄을 받는다.

요약하면 저성장 시대가 주식 투자에 꼭 부정적이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다. 사람처럼 국가 경제도 영원히 젊음과 활력을 유지할 수는 없다. 생로병사의 법칙이 기업과 국가 경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저성장 경제라는 말은 달리 표현하면 성숙 경제다. 한국 경제는 성숙한 어른이 된 것이지, 아직 노쇠해 가는 단계는 아니다. 장년기 인생은 질풍노도의 청춘 때와 또 다른 매력과 장점이 있다. 젊을 때보다 안정감이 있고 시야가 넓어진다. 따라서 현재 경제 상황을 놓고 투자자들이 우울해하거나 비관할 필요는 없다. 다만 젊고 활력 있는 성장 국가에 투자할 때와는 좀 다른 패러다임에 적응하면 된다.

이제 저성장 시대의 주식 투자 요령을 살펴볼 차례다.
첫째, 사업의 내공이 강한 기업에만 투자해야 한다. 고도 성장기에는 만성 수요 초과로 여러 회사가 동반 호황을 누릴 수 있지만 저성장 시대는 성숙된 수요와 과잉공급이 맞부딪히는 제로섬(Zero sum) 경쟁 양상이다. 압도적 경쟁력을 가진 소수의 기업만 살아남아 승자의 황홀한 연회를 즐긴다. 안타깝지만 내공이 약한 기업들은 저성장 시대의 희생양이다.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은 “썰물이 되어야 해변에서 누가 팬티를 안 입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저성장기는 고성장기의 밀물이 썰물로 바뀌는 시기다. 각 분야의 최고 경쟁력을 갖춘 기업을 일찌감치 점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경영진의 자질과 기업문화가 뛰어난 회사에 투자한다. 광속으로 변화하는 21세기 불확실성, 혼돈의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혁신을 주도하는 스마트 경영진과 개방적이고 유연한 조직 문화가 필수적이다. 그렇지 못한 기업은 당장엔 좋은 성과를 내는 듯해도 조심스레 접근해야 한다. 20세기의 숱한 초일류 기업들이 잘못된 경영판단과 임직원의 관료주의화로 몇 년 만에 몰락하는 현상을 자주 봐 왔다.

셋째, 시장에 투자하지 말고 기업에 투자하자. 많은 산업과 그에 속한 기업들이 사양길에 접어들면 종합주가지수나 업종별 지수 등 전반적 주가의 상승률은 투자자 기대에 미치기 힘들 것이다. 저성장 시대에는 잘되는 기업의 숫자가 점점 줄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특히 개인투자자들은 주가지수 예측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습성은 점점 의미를 잃을 것이다. 투자 종목도 여기저기 너무 벌려 놓으면 곤란하다. 가령 실력이 커가는 수출기업과 중국 소비 수혜 기업에 관심을 집중해 보자.



이원기(53) KB자산운용 대표를 지내고 2010년부터 영국 PCA그룹 산하 이스트스프링자산운용 대표를 맡고 있다. 메릴린치증권 리서치센터장 시절인 2000년대 초반 한국경제 10년 강세론을 펼쳤다. 서울대 경영학과와 미 UCLA MBA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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