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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미국을 다시 생각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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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오병상
수석논설위원

앨리스터 쿡(Alistair Cooke)은 영국 BBC의 전설이다. BBC 미국 특파원인 그는 58년 동안 BBC 라디오를 통해 ‘미국에서 온 편지(Letter from America)’라는 특파원 리포트 코너를 맡아 최장수 라디오 쇼 기록을 남겼다. 96살인 2004년 3월 2일 마이크를 놓고 3월 30일 숨졌다. 그가 남긴 말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나는 60년 동안 영국인들에게 ‘미국에는 카우보이만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한마디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거꾸로 말하자면 영국인들은 ‘미국에는 카우보이만 산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상식적으로 영국인만큼 미국을 잘 아는 사람들이 있을까. 영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만든 미국이다. 쿡이 ‘애썼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것을 보면 60년을 외쳤지만 설득에 성공하지 못한 듯하다.

 영국인들이 그런 정도인데, 과연 한국인들은 얼마나 미국을 알고 있을까. 문제는 많은 한국인이 미국을 잘 안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미국을 보는 한국인들의 시각이 점점 갈라지고 있고, 그 결과 한국 사회에서 ‘미국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편이 갈라지고 골이 깊어져 가고 있다. 모르면서 안다고 착각하면 편견(偏見)과 아집(我執)에 빠지기 마련이다.

 광우병 파동에는 이런 미국관(美國觀)의 양극화가 숨어 있다. 광우병 파동은 미국관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다. 이는 광우병이라는 역학(疫學)이나 과학의 영역을 넘어 정치와 심리의 문제다.

 미국 쇠고기 수입은 외교통상 분야 관리들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부시 대통령은 신자유주의 철학에 따라 자유무역협정(FTA)을 제대로 하고 싶어 했다. 중남미 작은 몇 나라와의 FTA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목한 나라가 한국과 일본이다. 외교통상 부문 관료들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FTA의 불가피성을 설득했다. 이왕 할 것이면 일본보다 먼저 하는 것이 유리할 수 있다. 노무현은 FTA를 결심했고, 미국은 쇠고기 문제를 별도의 테이블에 올렸다.

 노무현은 FTA 성사를 위해 ‘쇠고기 시장 개방’을 약속했지만 내심 내켜 하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라’는 미국의 압력은 계속됐다. 노 대통령이 퇴임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도 외교통상 관료들은 최종 승인을 요청했다. 노 대통령은 이들에게 “피도 눈물도 없느냐”고 꾸짖는다. 대선에서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대통령, FTA 타결 이후 지지자들로부터 폭풍 비난을 받고 있는 대통령에게 어찌 그런 야속한 요구를 하느냐는 항변이다.

 기본적으로 미국을 보는 노 대통령과 외교통상 관료들의 시각이 너무 달랐다. 노 대통령은 ‘반미(反美) 좀 하면 어때’라던 사람이다. FTA의 필요성은 인정했지만 미국 쇠고기에서 뼛조각이 발견되자 멀쩡한 고기까지 한꺼번에 반품해 미국을 경악하게 만들었던 사람이다. 반면 외교통상 분야에서 성공한 관료들은 미국의 절대적 영향력을 평생 보고 겪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경험상 미국의 힘은 거스르기 힘들며, 국제관례상 대통령의 약속위반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 출범으로 쇠고기 개방에 브레이크가 없어졌다. 친형(이상득)의 표현처럼 “뼛속까지 친미(親美)”답게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4월 19일 한·미 정상회담 하루 전 쇠고기 문제를 타결 지었다. 그 결과가 촛불이다. 물론 PD수첩의 오보 등 많은 악재들이 겹쳤다. 그러나 그 바닥에는 미국을 보는 일반 국민들의 눈높이와 다른 이명박 정권의 친미적 성향이 작용했다. 위키리크스 등에서 뒤늦게 확인된 것처럼 많은 고위 관료는 앞다퉈 우리의 협상전략이나 외교방침을 미국에 알려줬다. 외교통상 관료들이 애국이라 판단한 것들이 많은 국민들 눈에는 친미로 보였다.

 광우병 파동이 다시 터진 지금도 마찬가지다. “미국 자료에 따르면 아무 문제 없다”는 농수산식품부 장관의 말은 “미국 못 믿으면 아무것도 못한다”던 2008년 차관의 말처럼 국민의 반감만 산다. 그들이 경험한 미국과 국민들이 생각하는 미국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여당은 물론 일부 보수단체에서까지 ‘검역 중단’을 요구하는 데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하면서 “국민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대통령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이명박 정부 출범 직전 주한 미국대사 버시바우는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서 “한국이 변했다. 변화에 대한 적응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이젠 대등한 한·미 관계를 요구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보수주의자들은 이런 시대의 흐름을 뒤집으려 하겠지만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미국은 우리를 더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 우리는 미국을 모른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