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칼럼] 중국적 가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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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요슈카 피셔
전 독일 외무장관

중화인민공화국이 21세기를 주도할 것이라는 데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국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면 전 세계가 몸살을 앓게 될 정도다. 그렇다면 이런 중국이 진정한 글로벌 파워가 되려면 어떠한 가치가 바탕이 되어야 할까.

 1970년대부터 성장을 뒷받침했던 중국의 공식 정책인 ‘4대 근대화(농업·공업·국방·과학기술의 현대화)’로는 부족하다. 이제는 민주주의와 법치를 가리키는 ‘제5의 근대화’가 필요하다. 정치적 근대화는 중국공산당의 대대적인 반대에 직면해 왔다. 중국공산당은 일당독재 체제를 포기할 의사가 없다. 탄압을 중지하고 다당제로 체제를 전환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위험해 보인다. 비록 일당독재가 지속돼도 위험이 커지긴 마찬가지겠지만 말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봐서 중국 지도층이 인권·민주주의·법치를 거부하는 것은 이러한 보편적 가치라는 것이 ‘서구의 이익을 실현하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중국은 앞으로도 서구의 보편적 기준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서 생겨난 ‘아시아적 가치’라는 쪽으로 잠시 화제를 돌려보자. 오늘날까지 30년이 되도록 이 용어는 의미가 불분명하다. 이는 본래 집단적인 권위주의 지배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서구적 가치를 배제하고 지역 특유의 전통과 문화를 바탕으로 만든 주체적인 체제인 것처럼 꾸민 용어에 불과하다.

 아시아에서의 서구 식민주의 역사를 보면 뚜렷한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욕구는 수긍이 간다. 이제 옛날의 원한을 갚을 때가 왔다. 하지만 권력 유지와 아시아인으로서 뚜렷한 정체성 확립, 그리고 역사적인 옛 원한을 갚으려는 욕구를 한꺼번에 쉽게 해결할 수는 없다. 중국이 이번 세기의 지배적인 강국으로 떠오르면서 자기 기준을 스스로 세우려 하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한 나라가 세계적인 강국이 된다는 것은 그 나라의 전략적 중요성과 잠재성이 글로벌 수준에 미쳤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나라는 자신들의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이익을 지킨다. 강국의 가치관은 세계적 지배력을 강화해주는 중요한 요소다.

 냉전 시기에는 강대국들이 국제질서를 유지하고, 국제사회가 글로벌 헤게모니 구조에 적응하면서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소련은 국내외에서 보인 행동에서 설득이 아닌 강제에 의존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반대로 미국은 정치·경제적으로 서구의 모델이 되었다. 개인의 권리보장과 개방사회는 냉전 시대에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다. 미국은 강제력보다 설득력으로 국제사회의 헤게모니를 잡을 수 있었다.

 중국은 어떤 길을 가야 할까. 중국의 경제적 부흥은 서구식 근대화 모델을 과감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덩샤오핑(鄧小平)의 위대한 업적이다. 하지만 중국은 정치적 근대화라는 결정적인 질문에는 아직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나 다른 서구 국가들이 인권·법치·민주주의·다당제 같은 가치를 요구하는 배경에는 분명히 국익이 숨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가치는 서구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앞잡이 노릇만 하는 게 아니다. 이런 가치들은 사실 보편적인 것이며 포괄적인 글로벌 시대에서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보편적인 가치의 확립이란 점에서 아시아, 특히 중국이 기여할 가능성은 현재로선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제5의 근대화(민주주의와 법치)가 중국의 정치적 변화를 이끈다면 그런 시대는 반드시 올 것이다. 중국이 세계적 강대국으로 설 수 있느냐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렸다.

요슈카 피셔 전 독일 외무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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