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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해외 원조 현장을 가다 ② 빈곤의 고리 끊을 한국 ‘소프트 파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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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지난달 1일 몽골 울란바토르 칭길테구의 국가등록청 직원들이 공문서 발급을 위해 수작업으로 국가등록증 원본을 찾고 있다. 코이카와 추진해온 전산화 작업은 내년 완료된다. [울란바토르=민경원 기자]

지난 2월 베트남 수도 하노이시 짤럼현의 베트남 대법원 법관연수원 신축 현장.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KOICA)가 300만 달러를 들여 5월 말 완공할 예정 이다. 본관 행정동(2322㎡)과 기숙사동(2252㎡) 두 채로, 앞으로 베트남 사법 인재 양성의 요람으로 자리잡는다. 시설뿐 아니라 설계에 대해서도 만족합니다.” 응우옌뜩안 연수원 부원장은 짤막한 소감을 밝힌 뒤 “(코이카의 사업이) 법무 향상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곳에서 코이카의 지원은 최첨단 정보기술(IT) 장비를 갖춘 교육실이나 기숙사 같은 하드웨어에 그치지 않는다. 법관 양성교육 프로그램 자문, 커리큘럼 수립 등까지 아우른다. 이를 위해 한국의 전문가를 현지로 파견했다. 또 베트남 전문가를 연수생으로 한국에 초청했다. 코이카 베트남사무소 이동현 부소장은 “베트남 내 사법부 위상 강화와 법치주의 확립에 기여하고, 베트남 진출 한국 기업이 정당한 법의 적용을 받는 데도 도움을 줄 사업”이라고 말했다.

 ‘하드웨어는 기본, 소프트웨어·노하우는 덤으로’. 현지 밀착 한국형 원조 모델 ‘친구야(chinguya)’의 특징이다. 올해로 무상원조 21년째를 맞는 코이카 사업은 물고기 잡는 그물을 주는 것을 넘어 양식법까지 가르쳐준다. 특히 한국이 자신하는 IT 분야에서 호응도가 높다. 코이카는 2007년 개교한 베트남 중부 다낭시의 한국-베트남 친선IT대학(3년제) 설립에 1000만 달러를 무상 원조했다. 한국의 유수 전문가들을 초빙해 대학의 교수 연수도 진행했다. 이 대학의 4년제 승격 계획과 관련해 500만 달러를 추가 지원한다. 코이카는 또 네팔 부트왈 지역에 500만 달러를 들여 직업훈련원을 건설했다. 다음 달 개교할 이 학교는 매년 자동차·기계 등의 기술인력 300명을 양성하게 된다.

 한국의 IT는 각국 정부의 e-거버넌스(국가경영)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지난달 1일 몽골 울란바토르의 국가등록청에는 비자 발급, 취업 증명을 위해 국가등록 원본을 찾으러 온 이들로 북적거렸다. 서류 한 장 떼느라 1400㎞ 떨어진 옵스에서 이틀씩 차로 달려 온 60대 할머니도 있었다. 본청 도장이나 인증이 붙은 서류만 원본 효력을 갖는 시스템 탓이다. 이런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코이카는 지난해 4월부터 국가등록청과 함께 서류 2000만 건을 스캔 작업 중이다. 내년에 시스템이 완성되면 각자 거주지 도청에서 직접 서류를 뗄 수 있다. 안창수(45) 코이카 몽골사무소 부소장은 “한국이 비교우위를 가진 IT의 도움으로 몽골의 행정 근간이 재탄생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네팔에선 2008년 3500만 달러를 들여 정부통합데이터센터(GIDC)를 구축해 줬다. ▶주민등록 ▶전자여권 ▶국세정보망이 모두 전산화됐다. 인구 통계부터 여권 발급과 세금 징수까지 수기에 의존했던 네팔에서 GIDC 구축 후 민원처리가 수십 배 빨라졌다. IT를 지원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사회 시스템 정비야말로 수원국(원조 받는 나라)이 발전을 도모할 바탕이기 때문이다.

 수원국에 먹을거리를 마련해 주는 일에도 코이카는 한국형 노하우를 접목한다. 각국의 농가소득을 늘리기 위해 1970년대 ‘새마을운동’ 경험을 현지 사정에 맞게 적용하는 식이다. 필리핀 북부 일로코스 노르테주의 농촌마을 라왁에서는 최근 ‘백만장자’라고 불리는 주민들이 생겼다. 코이카가 2008년 이 지역에 설립한 병해충종합관리(IPM) 센터에서 농민들이 한국식 병해충 퇴치법과 유기농법을 배운 뒤 소득이 크게 늘어나면서다. IPM센터는 지금까지 현지 농부 7000명을 교육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소득이 두 배가량으로 늘어 부농 반열에 올랐다.

 일로코스 노르테주 노마 라그마이 농업국장은 “코이카는 농가의 부가가치 생산에 필요한 전문지식과 경험을 전수해 줬다”며 “코이카 단원이 물과 비료를 섞어 자동으로 뿌리는 ‘파워 스프레이’ 기술을 전수해 준 뒤로 주부들까지 난(蘭) 재배 등 원예농업에 뛰어들어 소득을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아예 ‘새마을모델 빌리지’를 꿈꾸는 곳도 있다. 네팔 서부지역 모티푸르에선 마을 한가운데에 새마을 깃발이 펄럭인다. 남궁창민(30), 권태형(26), 이진범(31), 이광화(32·여)씨 등 4명의 젊은이가 새마을형 모델을 만들겠다고 가져와 꽂은 것이다. 남궁창민씨는 염소 기르기 같은 축산 기법을 전수한다. 권태형씨는 3모작 등 농법을 개선한다. 이진범·이광화씨는 ‘미래의 곡식’ 격인 인재 육성에 힘쓰고 있다. 한국 드라마 ‘꽃보다 남자’가 인기를 끈 이곳에선 한국인 젊은이들을 드라마 주인공들을 따 ‘모티푸르 F4’라 부른다. 동네 틀이 잡혀가고 농가소득이 늘자 주변 마을들도 ‘모티푸르 배우기’에 나섰다.

 전문가들은 코이카식 무상원조가 ‘가난 극복 경험’에 기반해 있어 다른 선진국의 원조방식에 비해 개도국에 적용되는 효과가 크다고 말한다. 아르준 라지 조시(행정학) 네팔 트리뷰반대 교수는 “네팔은 비슷한 경제 수준에서 불과 50여 년 만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 된 한국의 노하우를 배우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코이카 필리핀 사무소 김영란 부소장은 “아무리 훌륭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지원한다고 해도 수원국에서 이를 ‘내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며 “코이카가 시설을 세우는 과정 등에 현지 인력과 자재를 적극 활용하고, 모든 사업 운영에 수원국 국민이 주도적인 위치에서 함께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것은 이들이 스스로 이익을 내는 구조를 습득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별취재팀=오영환(베트남)·강혜란(파라과이)
유지혜(필리핀)·이현택(네팔)·민경원(몽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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