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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433> ‘정치적 군대’ 중국 인민해방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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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올해 중국 최고 지도부는 4세대에서 5세대로 권력을 이양한다. 민감한 시기를 맞아 중국인민해방군(PLA·이하 해방군)이 주목받고 있다. 게다가 보시라이(薄熙來) 스캔들이 군부로 번지면서 세계 언론은 해방군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중국에서 군(軍)은 권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해방군은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핵심 변수로 등장했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정치와 군사가 분화되지 못한 까닭이다. 정치 군대 해방군을 해부했다.

개방정책 후 군축 단행 … 병력 230만 명 규모


후진타오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가운데)이 11명의 중앙군사위 위원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 지난 15일 군사박물관에 전시된 이 그림을 관람객들이 주시하고 있다. [UPI=연합뉴스]

중국의 무장력은 해방군·무장경찰·공안(公安·경찰) 등으로 구성된다. 이 중 해방군은 ‘인민에 소속된 무력’으로 출발했다. 1949년 9월 임시헌법 격인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결의한 ‘공동강령’ 제10조는 군의 임무로 ‘독립과 영토주권 보호, 혁명의 성취와 인민의 합법적 권익 보호’로 규정했다.

해방군의 총 병력은 230만 명 규모다. 2006년 국방백서에서 공개한 수치다(이후 병력 규모는 발표하지 않았다). 해방군 병력은 정치·외교 상황에 따라 변화했다. 신중국 설립(1949년) 직후 400만 명이었던 병력은 한국전쟁이 터지자 611만 명 규모로 늘었다. 이후 몇 차례 감축을 거쳐 1958년 240만 명 규모로 줄었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다시 늘어 1970년대 전반 다시 600만 명을 넘었다. 이후 국제적 긴장완화와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면서 군축을 단행했다. 1990년에 320만, 2000년 250만으로 줄었고 2004년 230만 명 규모로 정착됐다.

감춰진 무장력도 상당하다. 1952년부터 제도화된 민병(예비군)이 대표적이다. 민병 총수는 1953년 말 3340만 명, 57년 4900만 명, 마오쩌둥(毛澤東)이 ‘인민전쟁론’을 제기한 1958년 말에는 2억2000만 명을 기록했다. 80년대 들어서 민병도 줄었다. 2010년 국방백서에 따르면 현재 민병은 800만 명 규모다. 무장경찰은 66만 명 수준이다.

혁명시기 ‘혁명군’


1996년 중국인민해방군 군인들이 8월1일 창군일을 앞두고 베이징 근교에서 기념행진 연습을 하는 모습. [중앙포토]

해방군은 1927년 8월 1일 난창(南昌)봉기를 겪으며 창설됐다. 1928년 5월 ‘홍군(紅軍)’으로 변신한 군은 공산혁명을 집행하는 무장집단으로 자리잡았다. 시작부터 당의 군대였던 셈이다. 해방군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 조직 내 당원의 비율이 높다. 1949년 군인 네 명 중 한 명꼴인 26.6%가 당원이었다. 1987년 38%를 차지했다. 이 비율은 지금도 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현재 권력의 핵심인 공산당 중앙위원 204명 중 군인은 42명으로 20.6%를 차지한다.

혁명군의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우선 군대의 임무가 전투·방위에 제한되지 않는다. 생산과 정치활동도 본연의 임무다. 1949년의 ‘공동강령’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군대는 평화시기에는 군사임무를 방해하지 않는 조건에서 농업·공업 생산에 계획적으로 참가해 국가 건설을 돕는다”고 규정했다. 중국군은 국방군이고 혁명군이며 동시에 생산군이라는 얘기다. 혁명시기에 형성된 ‘당에 의한 지휘’는 지금도 여전하다. 1938년 11월 대장정을 마치고 옌안(延安)에 정착한 마오쩌둥은 이렇게 말했다. “공산당원 한 명 한 명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진리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원칙은 ‘당이 총을 지휘한다’는 것이다. 총이 당을 지휘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문혁시기의 ‘당군(黨軍)’

건국 이후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어떻게 막느냐가 문제로 등장했다. 혁명군을 정규군으로 전환해야 했다. 이 작업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야 시작됐다. 계급제와 봉급제 등을 통해 군령권을 강화했다. 그런 한편으로 당은 당위원회를 통해 ‘총 관리’에 나섰다. 이로써 해방군은 당의 정치지도와 군령권이 병립하는 형식을 갖췄다. 이 체제는 50년대 동안 지속됐다.

1954년 국방부장에 오른 펑다화이(彭德懷) 국방부장과 황커청(黃克誠) 총참모장이 군령권 강화를 주도했다. 그러나 이들은 1959년 여름 ‘반당 쿠데타’ 혐의로 실각했다. 뒤를 이은 린뱌오(林彪)는 정규군 작업을 중단하고 다시 혁명군 건설에 나섰다. 그는 정치 우선 노선을 내세우며 군의 혁명성을 유도했다. 린뱌오는 1963년 3월 “군에 대한 당의 절대적 지도를 실현하기 위해 당위원회 제도를 강화한다”는 내용을 담은 정치공작조례를 제정했다. 군내 당위원회를 지휘관의 상위에 놓았다. 군은 더욱 정치 속으로 개입했다. 문화대혁명 때 군이 정치 전면에 나선 배경이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군은 마오쩌둥 개인숭배, 이데올로기, 물리력을 통해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군인이 문혁 혁명위원회 주임을 독차지했다. 당 중앙에도 군인이 대거 진출했다. 사실상 당이 군대로 변했다. ‘당의 지휘’가 위험해지는 사건이 1971년 9월에 발생했다. 마오쩌둥 암살 계획이 탄로나자 린뱌오가 소련으로 탈출 도중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한 것이다. 린뱌오 사건은 ‘총이 당을 지휘’하는 상황을 막기 위한 ‘예방 쿠데타’로도 불린다.

개혁개방시기 ‘국군화(國軍化)’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鄧小平)은 농업·공업·국방·과학기술 발전이란 ‘4대 현대화’를 국시(國是)이자 당시(黨是)로 내세웠다. 군의 역할도 변모했다. 덩은 1978년 6월 정치공작조례를 통해 군의 규율회복, 전투력 강화, 정치위원 역할의 제한을 강조했다. 군을 국방군으로 만들어 정치로부터 떼어놓고자 힘썼다. 덩은 비대한 군에 칼을 댔다. 1984년 11월 그는 “나라의 발전 방향은 경제 건설이다. 군대는 이를 따라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를 근거로 1985년 5~6월에 열린 중앙군사위 확대회의에서 병력 100만 명을 감축하는 ‘전략적 전환’이 이뤄졌다. 2년 뒤 중국군은 400만에서 300만 명 수준으로 줄었다.

덩의 세계관에 기반한 감축이었다. 그는 당시 세계 전쟁을 일으킬 능력이 있는 나라는 미국과 소련뿐이라고 봤다. 양국 모두 전략적 핵무기로 군사적 균형을 갖췄지만 어느 한쪽도 절대적 우위에 서지 못하는 실정, 따라서 전쟁은 상당히 긴 기간 동안 피할 수 있다는 게 덩의 생각이었다. 그의 선택은 ‘경제 우선’이었다. 군은 정치에서 후퇴해 경제 발전에 종속됐다. 중국 정치의 주연 배우였던 군이 90년대 들어 조연으로 변한 것이다.

1989년 6월 천안문사건에서 중국군은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했다. 당시 중국 지도부는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군에 기댔다. 군은 공산당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치안군’이자, 적나라한 무력으로 현실 정치에 등장했다. 잠시나마 ‘총이 당을 지휘하는’ 상황이 도래하는 듯했다. 그러나 덩은 군의 정치 개입을 용납하지 않았다. 1992년 남순강화(南巡講話) 이후 경제 우선 방침이 변하지 않으면서 군이 전면에 나설 여지는 없었다.

당·국가·군의 삼위일체

1997년 3월 열린 전인대(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방법이 채택되면서 당·군 관계가 한층 명확해졌다. 국방법은 국가중앙군사위가 전국의 무장력을 통일 지휘하고, 군사전략과 작전을 결정한다고 규정했다. 또 해방군 체제 및 편제, 무장력 구성원의 임면 등에 대한 결정권을 갖는다고 규정했다. 중앙군사위가 군사에 관한 영도기관임을 국법으로 규정한 것이다. 국방법은 제19조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무장력은 중국 공산당의 영도를 받으며, 무장력 안의 당조직은 당규약에 따라 활동한다’고 규정했다. 당군(黨軍)임을 확실하게 했다. 국방법 제정을 지휘한 츠하오톈(遲浩田) 당시 국방장관(중앙군사위 부주석)은 “국방법에 무장력에 대한 당의 영도를 명확하게 규정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며 “‘당이 총을 지휘한다’는 원칙을 법률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국가·군’ 삼위일체가 무너지면 곧 체제 붕괴로 이어진다는 지도부의 공통된 인식이 ‘인민해방군=당군’임을 법률화시킨 것이다.

중국의 일부 전문가들은 당의 군 지휘에 대해 ‘중국 특색의 문민통제(시빌리언 컨트롤)’라고 말한다. 그러나 중국에서 당을 대신해 국가가 군대를 지휘하는 원칙과 시스템을 갖추는 진정한 문민통제는 아직 요원하다. 군이 일당독재를 지탱하는 유일한 물리적 힘이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모리 가즈코(毛里和子), 『現代中國政治』(나고야대학출판회, 2004), ‘중국 국방백서’(2002, 2004, 2006, 2008, 2010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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