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컴 게임의 법칙 '원칙'으로 U턴하다 [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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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인터넷 사업 호조

벤처 캐피털을 등에 업은 대형 닷컴 기업이 생존에 꼭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인터넷은 중소기업이 수많은 소비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소규모 업체의 경우, e베이처럼 ‘열린 장터’에서 물건을 판매하는 경우가 많지만 멘스 기프츠, 케인스 갈로어처럼 자체 웹사이트를 구축한 기업도 있다.

수십 년씩 연륜이 쌓인 소규모 업체들은 그런대로 이익을 내왔지만, 성장속도는 느린 편이었다. 프랭크 퍼거슨 사장이 3년 전 케인스갈로어닷컴으로 온라인 판매를 시작한 이후 매출은 매년 30%씩 늘었다. 현재 매출과 이익의 50%는 인터넷 판매에서 발생하고 있다. 미국 전역의 지팡이를 모두 모아둔다는 케인스갈로어닷컴의 사업모델은 아마존에서 얻은 것이지만, 아마존과는 분명 다른 점이 있다. 바로 이익을 낸다는 사실이다. 퍼거슨 사장은 “한 달이라도 적자를 방치하는 사람은 사장 자격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새로운 시장은 거대 닷컴의 모태

노드스트롬 백화점의 인터넷 판매 부문을 관장하는 노드스트롬닷컴사의 CEO 댄 노드스트롬. 온라인 기업이 오프라인 업체에 비해 반드시 효율적인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벤처 캐피털도 새로운 비즈니스를 위한 ‘원칙’에 다시 눈을 돌리고, 이를 충족하는 업체를 지원하고 있다. 즉,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효율성을 추구하고 이를 통해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 지적 재산권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 기업, 새로운 사업이나 새로운 영업 방식을 창안한 기업 등이 주목받는 것이다. 전자상거래 소프트웨어 제공업체인 아리바와 커머스 원이 무사히 살아남은 것도 이런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아리바는 지난 10월 전년 대비 700% 성장이라는 경이로운 실적을 보고했다. 같은 시기 발표된 경쟁업체 커머스 원의 매출 증가율은 전분기 대비 80%에 달했다.

B2B 전자상거래 부문의 경우 과대선전된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미 실패 사례도 많이 나왔고 앞으로 문을 닫는 기업도 속출할 것이다. 그러나 e-마켓플레이스의 난립에도 불구하고, 오프라인 기업들의 비용절감과 매출증대에 기여하는 곳은 문전성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온라인 역경매 방식을 통해 오웬스 코닝, 유나이티드 테크놀로지 같은 기업의 구매비용을 대폭 절감하게 해준 프리마케츠(FreeMarkets)도 요즘 각광받고 있다.

언론에 크게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혁신적인 B2B 전자상거래 업체는 그밖에도 많이 있다. 미네소타주 이든프레리 소재 니스테보(Nistevo)는 기업 물류비용을 수백만 달러나 절감할 수 있는 온라인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고 마켓플레이스를 구축했다. 제너럴 밀스, 랜드 오레이크스, 필즈버리 같은 회사는 배달을 마치고 빈차로 돌아오는 트럭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다른 업체가 이 트럭을 예약하면 양쪽 다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킨닷컴도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를 살린 사례다. 전화를 통해 전문가의 조언을 얻도록 한 킨닷컴은 전화망을 통해 돈을 지불하고 정보를 교류하는 플랫폼과 장터를 만들었다. 사용자들이 당초 취지대로 전문가의 조언을 듣건 지금처럼 섹스 채팅을 즐기건 킨닷컴은 이 플랫폼을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해 사업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기술 부문의 일대 변화로 인해 특정 분야의 기존 산업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기회가 발생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는 다소 진부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타당성은 여전하다. 지난 몇십 년간 이같은 격변은 줄곧 일어났고 실리콘밸리는 그런 변화의 바람을 타고 혁신의 메카로 성장했다. 앞으로도 이런 추세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미디어 부문만 해도 그렇다. 현재 음악산업을 뒤흔들고 있는 변화의 추세로 볼 때, 새로운 사업이 나타날 수 있는 분위기는 이미 무르익었다. 최근 베르텔스만과의 제휴 발표로 화제를 모은 냅스터에 대해 “음반회사와 손잡고 월 20달러씩 부과하는 정액제로 영업을 시작한다면 사업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광대역 기술과 무선통신 부문이 광범위하게 보급될 날도 멀지 않았다. 전자상거래 분야와 마찬가지로 무선통신 기술에 대한 전망도 과장된 면이 있다. 그러나 전자상거래가 그랬던 것처럼 무선통신 역시 소비자와 기업의 의사소통이나 상거래 방식을 바꿔놓을 것이다. 미 텍사스대의 휜스턴 교수는 수년 후면 이런 상황이 현실로 나타날 것이라며, “현명한 벤처 캐피털리스트라면 이런 변화가 아직 시작단계에 불과하며 앞으로 더 큰 변혁이 일어날 것임을 꿰뚫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인터넷 부문에 대한 투자가 크게 감소하고 있다는 조짐은 거의 없다. 벤처 캐피털의 투자 증가율이 어느 정도 둔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연초부터 현재까지 벤처 투자자금으로 조성돼 투자된 금액은 사상 최고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리서치 업체인 벤처 이코노믹스의 잠정 집계에 따르면, 올해 3분기까지 벤처 투자규모는 최소 600억 달러를 기록해 지난해 같은 기간의 332억 달러보다 크게 증가했다. 물론 벤처 투자는 지난 3년 동안의 마구잡이식 투자 행태에서 벗어나 지금까지와는 다른 면모를 보이는 업체들에 집중될 것이다.

인터넷이 제공하는 또다른 기회

개러지닷컴의 회의에 참석한 샤피로는 게임의 법칙이 달라졌음을 직감하고 있다. 그는 불과 여섯 달 전 대학을 졸업했다. 그러나 벤처 창업만으로 돈이 굴러 들어오던 시절은 지났음을 알 만큼 관록이 붙었다. 사실은 샤피로도 벤처 열풍의 수혜자였다. 존스 홉킨스대 재학 당시 고등학교 운동선수들의 신상정보를 수록한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어 10만 달러에 팔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 좋은 시절이 지나갔다는 것을 안다. 인터넷 컨설팅업을 표방하며 대학동창 네 명과 함께 벌인 두 번째 사업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는 것을 안다. 졸업 전까지 그들이 낸 매출은 총 8만 달러였다.

그래서 샤피로는 실리콘밸리로 왔다. 진짜 사업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기 위해 이제 막 출범한 프록시오(Proxio)사의 사업개발부에 입사했다. 샤피로는 “일에 대한 기본 정서는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사업구상을 실천하지 못하면 속이 상해서 잠이 안 온다고 진지하게 말하는 이 청년에게서는 가식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하지만 나의 현실 감각은 달라졌다. 신뢰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샤피로는 노트에 적어놓은 사업계획에 부족한 점이 많다는 걸 알고 있다. 아이디어를 수익성 있는 사업계획으로 구체화시켜야 하고 경쟁자들을 따돌릴 수 있는 기술혁신도 이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경영자로서 경험이 없는 풋내기에게는 아무도 돈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기회를 놓쳐버린 것일까?” 그는 자문하듯 말을 이었다. “아니다.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어진 것뿐이고 나는 그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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