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 넘나드는 야누스 '쿠베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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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팬터지 소설의 주인공은 대체로 인간이었다. 물론 그 인간은 보통 인간보다 특별한 권능을 가진 자, 즉 영웅이어야 하는데 그래야만 선과 악의 대립 속에서 악을 퇴치하고 혼란에 빠진 세상을 구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전9권 중 현재 3권까지 출간된 '쿠베린' 은 이런 점에서 매우 특이하다. 인간은 주인공의 자리에서 저만치 밀려나 기껏 70~80년에 불과한 수명을 누리는 미약하고도 열등한 종족으로 나타난다.

그 대신 묘인족.사인족.조인족.드워프족 같이 작가의 환상이 제조해낸 기묘한 캐릭터들이 대거 출현한다.

그러나 이들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 이브를 빚어내듯이 인간이 가진 여러 특성을 뽑아다 제조해낸 것들이다.

수치심을 모르고 아무하고나 짝짓기 하는 사인족, 배타적이고 고고한 척하며 숨어 사는 조인족, 빛을 안 좋아하고 지하나 굴에서만 사는 땅의 엘프, 광맥만 찾아다니는 드워프족 등…. 묘인족은 이중 어느 종족보다 뛰어난 전투력과 비범함을 소유한 종족이다.

이들은 자신보다 강한 자와 맞서 죽이거나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운명을 지녔다. 왕이 되려는 자는 가족과 형제마저도 죽여야 한다. '쿠베린' 은 이 묘인족의 왕이자 절대 권능의 화신이다.

'쿠베린' 이 흥미로운 것은 그가 선을 대표하는 탁월한 영웅이기 이전에 대물림된 종족 본능을 거부한 채 초인과 인간의 경계지점에서 양가감정을 보이는 캐릭터라는 데 있을 것이다.

시공의 제약에서 벗어난 '제2의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쿠베린의 모험은 그래서 인간의 소중한 가치를 환기하면서 한편으로는 잔인하고 무자비한 야수적인 본능을 동시에 보여준다.

더구나 전투와 모험의 반복적인 흐름은 마치 머그(mug)게임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점입가경의 흥미를 불러일으켜 독자들의 상상력을 한껏 부풀려 놓는다. 비범한 존재의 내면 속에 빚어지는 갈등과 상처란 야누스와도 같은, 그렇지만 악보다는 선을 지향하는 인간 본능의 만화경인 셈이다.

그러나 주인공의 성격이 지나치게 잔인하고, 또 일본 만화의 캐릭터들처럼 몇 단계에 걸쳐 변신이 가능하다는 설정은 이 작품이 성격창조보다 흥미 유발에만 기울어진 게 아닌가 하는 혐의를 갖게 한다. 인간에 대한 비판이 너무 피상적으로 흐르는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반지의 주인들' 의 작가 톨킨은 환상세계의 역사와 언어와 인물들을 창조하는 데 무려 40년을 바쳤다. 이런 예를 드는 것은 팬터지 소설이란 낯설고 기이한 소재의 제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정밀하게 구축해 내는 일이라는 생각에서다.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주제에 대한 깊은 천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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