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미소짓는 물고기' 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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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들의 일상에서 날렵하게 낚아 올린 삶에 대한 가벼운 성찰, 우울한 주제조차 웃으며 음미하게 만드는 붓터치, 짧지만 거듭 되새김질되는 그림 밑의 간단한 지문(地文) ….

이쯤에서 프랑스의 삽화작가 장 자크 상페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당신은 요즘 독서 유행에서 다소 뒤처진 편이다.

상페의 성인용 그림책 '라울 타뷔랭' 이나 '속깊은 이성친구' 등에 젖어본 독자라면 '대만 판(版) 젊은 상페' 쯤 되는 지미(幾米) 와의 만남도 즐거울 게 분명하다.

잘 나가던 광고 디자이너였던 작자는 백혈병에 걸려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재활에 성공, 1998년 첫 작품집을 내며 본격적인 창작생활을 시작했다.

삽화의 생동감, 언어의 시적 묘미에선 상페에 못미치는 듯 싶지만 동양적인 윤회.인연 사상 등이 가미된 작품세계가 한국인의 정서에 또다른 호소력을 갖는다.

어항 속에 갇혀 있는 물고기를 바다에 돌려보냄으로써 물고기에 자유를 선물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 '미소짓는 물고기' 에선 바로 그런 윤회사상이 엿보인다.

녹록잖은 주제지만 환상적이면서 유머러스한 삽화들이 결코 작품을 무겁게 만들지 않는다.

'왼쪽으로 가는 남자 오른쪽으로 가는 여자' 는 도시 남녀의 우연한 만남과 끝없는 엇갈림을 그린 작품. 적막하고 우울한 도시 정서를 표현했지만, 그러나 주인공들이 떠난 집의 벽이 봄볕과 함께 갈라지면서 새가 깃들이는 마지막 장면은 따스하다.

단편 모음집 '어떤 노래' 는 조금 다른 스타일을 보인다.

동양의 민화같은 간결하고 만화적인 소묘들을 통해 보다 직접적이고 통렬하게 사회를 풍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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