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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기타 함께 배우다 “누군가 위해 쓰자” 8인조 밴드로 뭉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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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0일 오전 11시 서울 송파구 잠실종합사회복지관 식당. 한 켠에서 기타연주와 함께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공연을 위한 무대도 음향시설도 없는 이곳. 조명이라고는 형광등이 전부다. 하지만 식당에 울려 퍼지는 노랫가락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은 어깨를 들썩인다. 한 곡 두 곡, 노래가 이어지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노인이 늘어난다. 음악봉사동아리 ‘조이사운드’의 공연 현장이다. 돈 한 푼 안 받지만 흥겨워하는 노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신이난다. 평균 연령 58세인 조이사운드 멤버 여덟 명이 음악봉사를 멈추지 못하는 이유다.

전민희 기자 , 사진=김진원 기자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조이사운드 회원들이 ‘고향의 봄’ 노래를 부르며 어르신들의 흥을 돋우고 있다.

조이사운드가 이날 어르신들을 위해 준비한 노래는 흘러간 가요와 동요를 합쳐 모두 10곡. ‘칠갑산’ ‘섬마을 선생님’ ‘고향의 봄’과 같이 어르신들이 젊은 시절 즐거웠던 한때를 떠올리게 하는 가락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조이사운드의 보컬 김수자(60·송파구 가락동)씨가 기타연주에 맞춰 ‘고향의 봄’을 부르자 노인 두세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이크를 넘겨받는다. 그리고는 목청을 높였다.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박자도 음정도 틀리지만 노래를 부르는 이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식당에는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었다.

 “칠갑산 할머니 어디 계세요?” ‘칠갑산’ 연주가 시작되자 보컬 김씨가 누군가를 찾는다. 박춘자(85·송파구 잠실본동) 할머니다. 박 할머니는 ‘칠갑산’ 노래만 나오면 어깨춤을 추며 흥을 돋워 ‘칠갑산 할머니’라 불린다. 김병률(88·송파구 잠실본동) 할아버지는 공연 장면을 휴대전화에 담기 바쁘다. “집에서도 조이사운드 노래를 듣고 싶은데 별다른 방법이 없더라고. 이렇게 녹화해놨다가 심심할 때 보면 외롭지 않을 것 같아. 복지관 선생한테서 휴대전화로 동영상 촬영하는 법까지 배웠어.”

 조이사운드가 음악봉사를 시작한 건 2008년 초. 2006년부터 송파여성문화회관에서 통기타를 배우며 인연을 맺은 김수자씨와 유윤석(54·송파구 송파동)·정은우(51·송파구 가락동)씨가 “뭐든 배웠으면 누군가를 위해 써먹어야 한다”며 뜻을 모았다. 이후 정순옥(60·송파구 신천동)·홍동표(65)씨 부부와 이경옥(52·송파구 문정동)·김임주(61·강남구 개포동)·이옥준(60·강남구 대치동)씨가 합류하면서 어엿한 ‘8인조 밴드’가 됐다. ‘조이사운드’는 ‘즐겁다’는 뜻의 조이(Joy)와 ‘소리’라는 뜻의 사운드(Sound)를 결합해 붙인 이름이다. “기타소리를 통해 사회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한 거예요. 기타를 치면서 우리 스스로 즐거움을 얻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으니 일석이조잖아요.” 그룹 결성 초기에는 지하철역이나 송파 지역 행사장에서 공연 요청이 들어왔다. 그러던 중 2008년 6월 송파여성문화회관 측 소개로 복지관 공연봉사를 시작했다. 매월 셋째 주 화요일엔 잠실종합복지관을, 둘째 주 화요일엔 가락복지관을 찾는다.

 이들의 공연이 처음부터 노인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던 건 아니다. 밴드 회장을 맡고 있는 정순옥씨는 “첫 공연을 했을 때 어르신들의 굳은 표정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노래를 따라 부르기는 커녕 박수도 치지 않았다. 공연을 하면서도 민망할 정도였다.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람들인데 우리를 동정하러 왔나’. 외로움에 사무친 노인들은 일회성 행사에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조이사운드 회원들이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복지관을 찾는다”고 다짐한 이유다. 그로부터 4년째. 이제는 어르신들도 마음을 열었다. 보컬 김씨는 “어르신들이 먼저 다가와 ‘무릎이 아프다’ ‘약국에 다녀오느라 공연에 늦어서 미안하다’고 할 때 우리를 정말 가족처럼 맞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젠 ‘팬’도 생겼다. 잠실종합사회복지관 점심식사 시간은 원래 오전 11시30분에 시작하지만 조이사운드 공연이 펼쳐지는 셋째 주 화요일이면 오전 11시부터 어르신들이 몰려든다. 심지어 사전연습 시간인 오전 10시에 연습실을 찾아와 “고맙다” “오늘 공연도 기대하겠다”는 열성팬도 있다. 이날도 김두남(90·송파구 잠실1동) 할머니는 이들을 조금이라도 먼저 보기 위해 오전 9시30분부터 연습실 앞을 지켰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뭐혀. 조금 서두르면 귀가 이렇게 호강을 하는디···. 세상에 이렇게 고마운 사람들이 어딨어.”

 ‘봉사’는 조이사운드 회원 자신들에게도 삶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 강남 수서의 한 파출소에서 근무하는 유윤석씨는 이날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야간근무를 앞뒀지만 공연을 위해 낮잠을 반납했다. “피곤함이요? 봉사하면서 얻은 에너지 덕분에 피곤한지 모르고 삽니다. 어르신들에게 웃음을 주는 것, 그게 바로 민생(民生) 아닙니까?” 홍동표씨는 7년 전 제약회사를 정년퇴직한 뒤 여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하던 중 조이사운드를 알게 됐다. 회원이 되기 위해 주민센터에서 3개월 동안 기타를 배웠고, 부인까지 설득해 부부봉사를 실천하고 있다. “아내와 함께 화음을 맞추며 연주를 하고 봉사를 다니니 예전보다 금슬이 더 좋아졌습니다.” 이들은 “남을 도우면서 스스로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게 가장 큰 선물”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 달에 두 차례 진행해 온 조인사운드의 복지관 공연봉사는 오는 6월 100회를 맞는다. 그래서 요즘 ‘특별한’ 공연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좀 더 멋진 장소를 빌려 노래도 부르고, 시 낭송도 할 계획입니다. 기관의 도움을 받아 공연장을 찾아주는 분들에게 무료로 점심식사도 제공하고요. 더 많은 노인이 공연을 보고 삶의 활력을 찾는 게 우리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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